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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④, “쿠칭의 비극”

97 세계 청소년대회 남아공전에서 공격하는 안효연

2003년 12월 18일 KFA 홈페이지 기사...


아틀랜타 올림픽이 끝난 뒤 나는 박이천 감독님이 이끄는 U-19 대표팀의 주무로서 일하게 됐다. U-19 대표팀은 1990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이후 6년 만에 정상재탈환을 노리고 있었고, 더구나 대회 장소가 한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우승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아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서 워낙 오랜 기간 생활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수들을 다시 만나자니 어색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 그 대상이 대부분 고교생들인지라 더욱 색다른 면이 있었다.

U-19 대표팀의 사령탑인 박이천 감독님(당시 정명고 감독)은 매우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이셨다. 선수들이 모두 학생들인지라 엄하게 가르치셨고, 따라서 선수들은 감독님을 다소 어려워하기도 했다.

96년 여름 처음 대표팀이 소집되어 진주에서 훈련했을 때는 체력강화를 위주로 훈련이 진행됐다. 어떤 때는 하루에 4차례 훈련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새벽에 산을 타며 체력강화를 꾀했고, 오전, 오후 훈련에 이어 저녁에는 개인훈련을 실시했다.

선수들 모두 힘들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오후 10시 정도면 숙소가 조용해졌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청소년대표팀에 대한 지원은 국가대표팀이나 올림픽대표팀에 비해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호텔보다는 다소 여건이 떨어지는 선수촌 같은 곳에서 훈련을 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훈련에 임하는 의욕은 대단했다.

일본 초청경기 및 호주전지훈련

U-19 대표팀의 공식 첫 경기는 일본과의 경기였다. 1996년 8월 18일 평택에서 열린 경기에서 우리는 고종수, 서기복, 장기봉의 연속골에 힘입어 3-2로 승리했다. 첫 공식경기인데다가 일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텔레비젼으로 중계도 돼 처음으로 선수들의 경기 모습이 방송을 탔다.

8월 24일부터 9월 7일까지는 호주 전지훈련을 통해 팀웍을 가다듬었다. 호주의 클럽팀들과 6번의 평가전을 가져 전승을 거뒀고, 호주 U-19 대표팀과도 2차례 경기를 1승 1패를 기록했다.

일본과의 평가전 및 호주 전지훈련을 통해 가진 9번의 경기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고종수였다.   사실 종수는 금호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아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에도 잠깐 선발됐을 정도로 기량은 출중했다.

종수는 평가전 9게임에서 8골을 뽑아내는 골감각을 과시했다.  종수는 78년생으로 주장 김도균(77년 1월)에 비하면 2학년이 아래이고, 일반적인 77년생들에 비해서도 1학년이 아래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박병주도 6골을 터트리며 중심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을 해줬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주 전지훈련을 끝으로 더 이상 종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종수는 활달한 기질을 갖고 있었지만, 팀내 융합이란 측면에서 감독님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박이천 감독님은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는 선수를 원했고, 그런 면에서 종수가 다소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전체적인 팀분위기 쇄신을 위해 과감히 대표팀에서 제외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종수의 재능을 생각한다면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 팀의 분위기상 감독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선수들을 잠시 언급한다면 먼저 대표팀의 주장은 이 팀이 해산될때까지 줄곧 김도균이 맡았다. 도균이는 앞에서도 언급됐듯이 77년생이면서도 생일이 빨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1학년이 높았고, 과묵한 스타일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팀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는데다가 책임감도 있었기 때문에 주장감이었다.

이관우나 박병주, 정석근 같은 선수들은 활발한 성격이었다. 특히 분위기메이커는 석근(현재 광주 상무 소속)이었다. 감독님께서 선수들이 장난치고 까불까불거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얌전한 듯 보였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석근이가 동료들을 많이 웃겼다. 서기복과 박진섭 같은 선수들은 활발한 가운데 차분함이 섞여있는 유형이었다.

홈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다.

1996년 10월, U-19 아시아선수권(2002년 대회부터 U-20 선수권으로 명칭 변경. 나이제한은 동일)이 한국에서 열렸고, 당연히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었다.

우리는 태국을 4-0으로 대파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 이어 만만찮은 상대 UAE 역시 3-0으로 완파했다. 약체 방글라데시와의 3차전에서도 5-2로 승리했으며, 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는 김남일과 남기성의 연속골에 힘입어 난적 이란을 2-1로 꺾고 조 1위로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아에 세계대회 티켓이 4장 배정됐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세계대회 진출도 확정된 순간이었다.

4강전 상대는 라이벌 일본이었다. 9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한국을 추격해온 일본은 전력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은 팀이었고, 당시 조직력 면에서는 한국보다 낫다는 평가도 나왔었다. 일본 선수들 역시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일본 언론과 감독은 한국을 종이호랑이라고 표현하며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시 일본팀은 야나기사와, 미야모토, 묘진 같은 선수가 주축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자신감이 있었다. 모두가 일본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회를 치르기 전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실시했던 것이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박병주나 이관우 같은 선수들도 나에게 “체력훈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전반을 뛰고도 땀이 나지 않는다”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팀 전체가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선수들은 적어도 아시아무대만큼은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90년 우승 이후 6년만의 정상재탈환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 수원에서 열린 일본과의 4강전에서 결국 양현정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 UAE를 꺾은 중국과 결승에서 만나게 됐다.  경기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사실 중국전에 대해서는 큰 부담이 없었다. 당시 중국이 4백 시스템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의 스피드가 월등히 앞서는 것을 이용해 2선에서 공간을 침투하고 양 날개를 이용한 돌파 등으로 중국을 공략했다.

그런데 의외로 중국 역시 수비 위주가 아닌 맞대결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나는 마음 속으로 ‘오늘 대량득점을 할 것 같다’라는 예감을 했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실력차이가 나는데 맞대결로 나오니 더욱 편하게 경기를 할 수 있었고, 결국 정석근, 이관우, 양현정의 릴레이골로 3-0 대승을 거뒀다.

97년 말레이시아 U-20 세계선수권을 준비하며

아시아선수권이 끝난 뒤 박이천 감독님은 세계대회 본선에서 대결이 예상되는 대륙과의 실전경험을 위해 남미와 유럽, 아프리카 전지훈련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협회의 여건과 그 쪽의 사정 등으로 인해 남미, 아프리카 전지훈련은 취소되고, 유럽과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조 추첨 결과 유럽(프랑스), 남미(브라질), 아프리카(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팀씩 같은 조에 포함됐다. 조 추첨 결과를 본 감독님은 남미와 아프리카 전지훈련이 취소된 것을 새삼 안타까워하셨다. 대회에 앞서 선수들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때문이셨다.

어쨌든 1997년 2월 7일부터 25일까지 대표팀은 유럽전지훈련을 떠나 현지팀과의 실전경험을 쌓았다. 먼저 잉글랜드에서는 웨스트햄(1-3패) 및 레스터 시티(3-0승) U-20 팀과 평가전을 치렀고, 마지막 노르웨이 U-21 대표팀과의 경기에선 0-4로 패했다. 북유럽팀의 파워와 스피드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후 그리스로 이동해 그리스 U-20 대표팀(1-2패)과 파나티나이코스(1-1무), 아폴론 클럽(1-2패) 등과 경기를 펼치며 유럽축구에 적응했다.

97년초에 서귀포에서 훈련을 했던 적이 있는데, 이동국도 잠깐 합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동국이는 포철공고에서 뛰고 있었고, 고교랭킹 1위로 평가받고 있었다. 고교생답게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막내인지라 아이스박스 들고, 볼을 챙기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역시 나이가 어린만큼 양현정이나 이관우, 박병주 같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고 말았다.

세계대회 개막을 2달여 앞둔 97년 4월에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나 이란과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에서 실전경험을 쌓았다. 특히 시리아 국가대표팀과 레바논 국가대표팀 2진과도 경기를 펼쳤는데, 두 팀 모두에게 1-2로 패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이란에서 훈련할 때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곳이 고도가 800m 정도로 높았고, 그래서인지 훈련하다가 선수들이 코피를 흘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먹을 것이 부족해 양고기를 둘둘 말아 케밥 비슷하게 먹기도 하고, 나가서 뭘 사먹고 싶어도 없어서 통조림 같은 것을 사서 먹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해외에서의 전지훈련을 모두 마치고 대표팀은 국내에서 미국, 가나, 아르헨티나 등과의 평가전을 통해 마무리 전력점검을 실시했다. 특히 세계대회 개막 열흘 전 잠실에서 있었던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을 통해서 선수들은 많은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전 대회 우승팀이었고, 97 말레이시아 대회에서도 결국 우승을 차지했던 팀. 그들 역시 세계대회를 앞두고 최종엔트리를 선정, 현지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전력점검의 기회였기 때문에 베스트 멤버가 모두 투입됐다. 현재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파블로 아이마르(발렌시아), 월터 사무엘(AS로마), 후안 리켈메(비야레알) 등이 모두 경기에 나선 것.

그리고 그 경기에서 우리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결국 양현정의 골로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감했다. 자신감에 충만한 우리는 10일 앞으로 다가온 세계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쿠칭의 비극

우리 경기가 벌어지는 말레이시아 쿠칭에 도착해 처음 느낀 것은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컨디션에 지장을 줄 수도 있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나라도 같은 조건이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엇보다 해외에 나가서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 수 없다. 다행히도 현지 호텔에서의 뷔페식도 괜찮았고, 거기에 우리가 가져간 음식들을 적절하게 먹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먹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우리의 1차전 상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는데, 선수들 모두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선수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유럽 스카우트들도 많이 와있다니까 실력 보여주고 유럽진출하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시아선수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고, 이전 청소년대표팀들에 비해서는 해외원정도 많이 갔고, 지금과는 달리 모두 아마추어 선수들인지라 대표팀 소집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 충실하게, 자신감있게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남아공을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경기가 시작되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우리였다. 그러나 몇 차례 좋은 득점기회가 모두 무산됐고,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를 0-0 득점 없이 마치고 말았다. 사실상 ‘쿠칭의 비극’이라고 불리우는 말레이시아 대회의 악몽은 첫 경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승점 3점을 얻을 수 있었던 경기에서 승점 1점만을 챙기게 되자 팀 전체가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선수들의 몸을 무겁게 했는지 프랑스전에서 경기 시작 3분 만에 2골을 내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고, 최상의 플레이를 보여주지도 못한 채 2-4로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시작한지 2분 만에 티에리 앙리(현 아스날)에게 선제골을 내준 것이 타격이 컸다. 경기장에서 체험한 프랑스의 스피드는 매우 빨랐다. 스피드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공격을 펼치는데 정신이 없었다.

사실 다른 경기를 봤을 때는 프랑스와 우리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 차이가 확연히 났다. 사실 남아공전이 끝난 뒤에는 “프랑스를 잡고 올라가자!”라는 분위기였는데, 실제상황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현 유벤투스), 미카엘 실베스트레(현 맨체스터 Utd), 윌리 사뇰(현 바이에른 뮌헨), 윌리엄 갈라스(현 첼시) 등 현 프랑스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앙리와 트레제게의 공격 듀오 위력은 대단했고, 우리와의 경기에서도 이 두 선수가 나란히 2골씩 뽑아낸 바 있다. 특히 앙리의 스피드는 가공할 만 했다. 체격조건도 190cm에 가까운 선수가 어떻게 그런 스피드를 내는지 놀라웠다.

김도균이랑 경합을 벌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볼을 잡자마자 툭 치고 달리는데 도저히 도균이가 따라가지를 못했다. 스피드와 재간, 여유..모든 면에서 탑 클래스 선수다웠다.

그나마 0-4로 뒤지던 경기를 박진섭이 두골을 넣어 2-4까지 끌고갈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의 체력 덕분이었다. 사실 청소년 연령대의 선수들은 한번 무너지면 회생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앞에서도 말했듯이 체력적인 부분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영패의 수모는 벗어날 수 있었다. 유럽, 남미 선수들이 후반에 지치고, 더군다나 경기에 이기고 있어 다소 느슨해진 반면 우리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경기장을 누비며 반격의 기회를 찾았던 것이다.

프랑스전이 끝난 뒤 선수들은 한결같이 세계의 벽 같은 것을 느꼈다고 실토했다.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고, 사랑방인 물리치료실에서 선수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왜 그렇게 빠르냐. 우리나라는 그 키에 그런 스피드와 재간이 나오지 않는데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맞이한 브라질전. 이 경기에서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브라질의 스트라이커 아다일톤에게 6골을 내주는 등 총 10골을 허용하며, 3-10으로 대패하고 말았던 것.

사실 프랑스전이 끝난 시점에서 선수들은 브라질전도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브라질의 전력은 우리 조에서 최강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실제로 프랑스를 3-0, 남아공을 2-0으로 완파하며 그 평가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라질전을 앞두고 선수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된 것을 느낀 코칭스태프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기에 선수들을 불러 “이대로 3연패를 하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정말 마지막이다. 마지막 종착역인데 이대로 돌아갈거냐? 최선을 다하자”라고 당부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브라질과의 실력차이가 분명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까지 대패할 팀은 아니었다. 일단 프랑스에 패한 뒤 브라질전에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수준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대량실점의 빌미가 되었다.

또한 전반 초반 정신력을 바탕으로 좋은 경기를 펼쳤으나 전반 20분, 페르난도에게 선제골을 내준 뒤 선수들의 정신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브라질의 무차별 공세에 당하고 말았다. 아직 어린 선수들인지라 한번 무너지니까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전반에만 6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나는 주무로서 벤치에 앉아 경기 기록부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브라질이 그렇게 많은 골을 넣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득점 상황을 큰 글씨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이 7골을 넣고나자 더이상 득점 상황칸에 여백이 없어 글을 쓸수가 없었다.  한동안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하는수 없이 경기 기록지 뒷장에 브라질의 나머지 득점 상황을 적어야만 했다.  축구협회 경기국 직원으로서 수많은 경기의 기록부를 작성했지만 그런 황당한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나마 후반 들어 이관우, 정석근, 이정민이 득점에 성공, 3골을 넣은 것이 위안거리였다.

이 경기의 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선수들은 한동안 쿠칭에서의 패배가 뇌리에 떠올라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특히 골키퍼였던 정유석(현 부산 아이콘스)은 충격이 컸을 것이다.

골키퍼가 골을 많이 허용하면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심지어 골키퍼 보호구역 밖으로 나오는 것도 망설이게 된다고 한다. 유석이도 마찬가지였고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를 충분히 나와서 펀칭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나오지 못하고, 수비수한테 맡겨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량실점에 대한 충격이 컸기 때문에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고, 이것이 결국 더욱 큰 실점으로 이어졌다. 물론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많이 놀라고, 지치기도 하고, 실망감도 컸다. 경기가 끝난 뒤 모두가 극도의 허무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귀국한 뒤 기술위원회에 결과보고를 할 때 박이천 감독님은 머리를 삭발하고 오셨다. 그만큼 책임감이 있으셨고, 욕심도 있으셨던 것이다. 감독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눈시울이 불거졌다. 지금은 웃으면서 “감독님, 그 때 왜 그러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도 힘든 대회였다. 주무 역시 결과에 따라 울고 웃는데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 내가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해서 진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 우리가 준비도 많이 했음에도 세계의 벽은 여전히 높다는 것도 새삼 느꼈고...

사실 아틀랜타 올림픽에 갔다와서 ‘자신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경기내용도 좋았고, 스코어도 아까웠다. 그래서 청소년들도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충격이었다.

이후 나는 99년 나이지리아 U-20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U-20 대표팀 주무를 맡으며 또다시 세계대회를 준비하게 됐다.

-> 5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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