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Total 276 articles, 19 pages/ current page is 9
   

 

  View Articles
Name  
   MUKTA 
File #1  
   olyteam_031212.jpg (109.4 KB)   Download : 25
Subject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②,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며”


2003년 12월 12일 KFA 홈페이지 기사...


살벌했던 인도네시아와의 올림픽 1차예선

본격적인 출발을 한 올림픽대표팀은 1995년 5월 21일과 25일 홍콩, 인도네시아와 올림픽 1차 예선 1차 라운드를 원정경기로 치렀다.

홍콩과의 원정경기에서는 쉽게 5-0으로 승리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사실 홍콩에서는 양 팀간의 실력차도 너무 많이 나고, 치안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 일이 없었다. 문제는 인도네시아와의 원정경기였다. 경기 자체보다도 경기 외적인 면에서 선수단 전체가 무서운 경험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처음 훈련할 때만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경기 당일이 되니까 인도네시아 축구팬들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이 날아왔다.  할수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안전한 곳까지 이동해야 했다.

그곳에서도 관중들이 모여들어 잽싸게 선수대기실로 도망쳐야 했고, 기자단이나 프레스센터가 있는 곳으로 가려해도 태극마크가 있는 옷을 입고는 도저히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기 중에도 관중들이  우리 팀 벤치나 선수들을 향해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을 계속 던져 그 조그만 벤치 안에서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판에게 이야기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박충균은 인도네시아 공격수와 경합하다가 팔꿈치에 맞아 입술이 찢어졌고, 골키퍼였던 서동명도 상대 공격수와 공중볼을 다투다가 떨어져 기절, 결국 이운재로 교체될 정도였다. 윤정환도 교체되어 나오다가 관중이 던진 돌에 가슴을 맞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도  2-1로 승리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도 우리는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경기에 뛴 선수들은 경기장 한가운데서 기다렸고, 코칭스태프와 나머지 선수들은 벤치에 숨어있어야 했다. 한참이 지나 관중들이 경기장을 떠난 후에야 그라운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초보 주무였던 나도 그렇고, 아직 어렸던 선수들도 그렇고 정말 견디기 힘든 경험을 했다. 공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했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1995년 8월에 한국에서 2차 라운드가 열렸는데,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이나 ‘한국에 오기만 해봐라’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닥치자 그 동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도 누그러졌고, 우리가 홈팀이고 실력차이도 있었기 때문에 깨끗한 경기로 진행됐다.
어쨌든 한국에서의 2연전에서도 홍콩과 인도네시아를 꺾고, 우리는 4연승으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아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앞두고 수많은 해외전지훈련을 떠나다.

아마 지금까지 그 어떤 대표팀도 96 올림픽대표팀만큼 해외전지훈련을 많이 떠난 팀은 없었을 것이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치르기 전까지 유럽 3차례, 미국 1차례 등 4번의 전지훈련을 떠났고, 호주국제대회와 홍콩 칼스버그컵, 다이너스티컵 등의 국제대회를 치렀다.

또한 국내에서는 보타포고(브라질), 헤레디아노(코스타리나), 예테보리(스웨덴)클럽과 경기했고, 가나, 멕시코, 러시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올림픽대표팀 등을 초청해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올림픽 대표팀 멤버들이 프로가 아닌 대학 선수여서 각 팀에서 선수를 차출해 주는 것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그 무렵이 한창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힘쓰고 있던 시절이라 우리 팀이 월드컵 유치 홍보단 비슷한 역할도 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여러 가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흔쾌히 원정에 나섰다. 다만 계속되는 해외원정으로 선수들이 막바지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쳤던 부분은 있었다.

전지훈련에서 우리와 맞붙었던 유럽 선수들은 한국에서 왔다하면 한수 아래로 보고 처음부터 무시하면서 거칠게 플레이를 했다.  이로 인해 우리 선수들도 화가 나서 과격하게 대응해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상대의 거친 플레이를 보다 못한 비쇼베츠 감독님이 경기를 도중에 중단시킨 적도 있었다.

한편 주무 입장에서 보면 해외원정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당시 이상락 차장님(현재 기획실 근무)과 함께 움직였는데, 전지훈련 한번 떠날 때마다 각종 준비에 부식, 유니폼 등 신경써야할 것이 많아 고생했다. 내 기억으로는 1달에 3-4일 정도만 집에 들어갔던 것 같다. 총각이었으니까 가능했지, 지금이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올림픽대표팀은 사실상 내 첫 번째 팀이었기 때문에 많은 애정이 있었고,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면서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몸살도 많이 나고, 힘든 일도 많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티내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에는 장비 담당 등 다른 스태프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무업무가 더 힘들었지만, 코칭스태프나 팀 닥터가 신경 써주고, 막내 선수들도 내 일을 조금씩 도와줬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선수들이 한국음식을 많이 찾아서 항상 김치나 고추장, 된장 등을 잔뜩 가져가야 하고, 떨어졌을 경우 현지에서 한인회 등을 통해 조달해야 하는 점이 어려웠다.

세탁물 같은 경우도 지금은 호텔에서 해주지만, 당시에는 전지훈련비용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비용을 절감한다고 직접 호텔 밖에 갖고 나가 세탁을 하곤 했다. 오전에 세탁물을 가지고 나가서 오후에 찾아오곤 했는데, 힘든 일이었다.

유럽의 벽을 느꼈던 유럽 2차 전지훈련

1995년 11월에 있었던 2차 유럽전지훈련에서 우리는 노르웨이, 스웨덴 올림픽대표팀 및 벨기에 클럽팀들과 평가전을 치렀다. 특히 노르웨이, 스웨덴 올림픽대표팀과의 경기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노르웨이전에서는 0-0으로 비겼고, 스웨덴전에서는 0-3으로 완패를 했는데 일단 체격조건에서 차이가 났다. 우리도 대부분이 180cm를 넘어서는 등 결코 작은 체격이 아니었음에도 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힘과 스피드, 신장, 체력 등에서 모두 부족했다. 한마디로 북유럽 축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선수들도 경기 후에 한결같이 “장난이 아니다. 유럽과의 실력 차이를 느꼈다. 한발 더 뛰고, 실력을 더욱 가다듬어야겠다”라는 말들을 했다.

이후에도 올림픽대표팀은 96년 1월 이탈리아 전지훈련을 통해 AS로마, 라치오 유스팀 등과 평가전을 치르기도 했으며, 2월에는 미국 전지훈련에서 덴마크, 미국, 멕시코, 캐나다 올림픽대표팀과 4개국 친선대회를 치르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의 많은 실전경험을 통해 전력을 향상시켰다.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던 올림픽 최종예선

96 아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은 1차예선을 통과한 8개팀이 4개팀씩 2개조로 나눠 풀리그를 벌이고, 각조 상위 2개팀이 4강에 진출, 크로스 토너먼트를 치러 3위팀까지 올림픽 본선티켓을 획득하는 형식으로 치러졌다. 대회장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우리는 사우디 아라비아, 카자흐스탄, 중국과 한 조를 이뤘는데, 사실 처음에는 선수들의 몸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몸이 무거운 상태였고, 결국 사우디와의 1차전에서는 힘든 경기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언론에서는 ‘잘나가던 올림픽대표팀이 왜 이러나’하는 식으로 기사가 나오기도 했으나 감독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수들의 몸이 초반에 무거웠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준결승 이후로 선수들의 컨디션 사이클을 맞추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우디전에서의 고전 이후 카자흐스탄을 맞이해 2-1로 승리하며 어느 정도 컨디션을 찾았고, 중국과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준결승에서 맞붙은 이라크 역시 전반에만 2골을 뽑아내며 2-1로 승리, 올림픽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결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팀은 라이벌 일본이었다. 이미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태이긴 했지만, 일본과의 대결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당시 일본전의 키포인트는 일본의 플레이메이커 마에조노를 어떻게 봉쇄하느냐는 것이었다. 비쇼베츠 감독님도 이 부분에 대해 고심을 많이 하셨는데, 최종선택은 최성용을 마에조노 전담 마크맨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성용이는 스피드, 체력, 근성 등에서 매우 강점을 보이는 선수인지라 이 임무에 적격이었고, 경기 내내 마에조노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완전히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사령탑을 잃은 일본은 경기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2-1로 승리를 거뒀다.

비쇼베츠 감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비쇼베츠 감독님과는 사적인 대화는 거의 해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적인 부분, 즉 훈련관련 이야기라든지, 운동장 준비나 물품준비에 대해서 주로 대화했다.

같이 식사를 하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고, 러시아인 코치와 러시아어 통역이 있었기 때문에 비쇼베츠 감독은 주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지도자로서 훈련 프로그램이나 여러 준비를 꼼꼼하게 잘 준비하는 것 같았다. 당일날 훈련할 내용들을 노트에 꼼꼼하게 적어서 훈련에 앞서 항상 먼저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평소 훈련에서는 매우 엄격했다. 훈련목표량에 도달할 때까지 타이트하게 훈련을 실시했고, 부상 선수들도 직접 챙기시는 모습이었다.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을 이야기하자면 출범 초기 식사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식사 시간에 우리 선수들이 워낙 말없이, 그것도 1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전부 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감독님이 의아해하면서 물어보신 적이 있다. “선수들이 저렇게 빨리, 말도 없이 식사를 끝마치고 방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

내가 “오후 훈련에 대비해 TV를 보든지, 음악을 들으면서 휴식을 취한다”고 대답하자 “그럼 소화가 제대로 되느냐?  앞두로는 식사시간에 천천히 먹고, 대화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식사 후에는 꼭 산책을 하도록 해라”고 말했다.

그 이후에는 선수들도 그런 요구에 맞춰 여유있게 식사를 하면서 대화도 많이 나누고, 식사 후에는 호텔 주변을 산책도 하고, 낮잠도 자면서 오후훈련에 대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한편 비쇼베츠 감독님의 스타일이 다소 폐쇄적인 부분이 있어서인지 선수들과의 불화설, 코칭스태프와의 불화설 등이 심심찮게 터져나오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먼저 선수들과의 불화설은 사실과는 다르다. 물론 비쇼베츠 감독님이 초기부터 주전 선수 위주로 팀을 운영했고, 이에 따라 비주전 선수들이 불만을 품은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어느 팀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전 선수들은 불만 없이 감독님의 지시를 잘 따랐다.

반면 코칭스태프와의 관계에서는 약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 협회 기술위원회에서는 이영무 감독님(현재 할렐루야 감독 및 축구협회 기술위원)을 코치로 추천했었는데, 비쇼베츠 감독님이 거부하신 적이 있다. 감독님이 오해를 한 것이었는데 기술위원회에서 자신을 감시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김성남 감독(현재 홍익대 감독)도 코치를 하다가 그만두셨는데, 코치로서의 역할분담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이었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모든 일을 자신이 컨트롤해야한다는 사고를 갖고 계신 분이었고, 그로 인해 코치들에게 큰 역할을 나눠주지 않았다. 쉽게 말해 코치들에게 잔업무만을 시키신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연습때는 콘을 나르고, 그것을 이렇게 배치해라” 등의 단순 업무만을 나눠줬던 것. 아마 김성남 감독님이 많이 서운하했을 것이다.

결국 후임으로 김학범 코치(현 성남일화 코치)와 조병득 코치(현 전남 GK코치)님이 오셨는데,  이때부터는 협회에서 비쇼베츠 감독님에게 “코치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요구했고, 감독님도 동의하셨기에 원만하게 팀이 운영될 수 있었다.

-> 3편에 계속..

-- MUKTA 상헌 --


    

 




156
 ②현 브라질올림픽대표 나드손, “K리그에서도 최고 골...

MUKTA
2004/10/09 1547
155
 U-18 대표팀 주장 백지훈, “같은 연령대 기량을 뛰...

MUKTA
2004/10/09 1271
154
 건국대 우승의 주역 김형범, “스피드를 무기로 상대수...

MUKTA
2004/10/25 1466
153
 ①진장상곤 인스트럭터, “국내 최초로 AFC B급 라이센...

MUKTA
2004/10/25 2430
152
 ②진장상곤 인스트럭터,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도자 ...

MUKTA
2004/10/25 2006
151
 ①U-20팀 박성화 감독, “빠른 템포의 공격과 압박축...

MUKTA
2004/10/25 1330
150
 ②U-20팀 박성화 감독, “빠른 템포의 공격과 압박축...

MUKTA
2004/10/25 1301
149
 ③U-20팀 박성화 감독, “빠른 템포의 공격과 압박축...

MUKTA
2004/10/25 1217
148
 대학축구 MVP 여승원, “신생팀 인천에서 새롭게 도...

MUKTA
2004/10/25 1897
147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①, “96 아틀랜타 올림...

MUKTA
2004/11/04 2228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②, “96 아틀랜타 올림...

MUKTA
2004/11/04 1496
145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③, “96 아틀랜타 올림...

MUKTA
2004/11/04 1446
144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④, “쿠칭의 비극”

MUKTA
2004/11/04 1756
143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⑤, "99년 U-20세계선수...

MUKTA
2004/11/04 2416
142
 왕년의 스타 임근재, “지도자 및 생활체육 선수로서 ...

MUKTA
2004/11/04 1969
[1][2][3][4][5][6][7][8] 9 [10]..[19]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Headv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