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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한국축구외교의 산증인 오완건 前부회장, “38년간 정들었던 축구협회를 떠나며”


2004년 2월 5일 KFA 홈페이지 기사...


지난 1966년 3월 대한축구협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뒤 38년간 축구협회 국제관계 일을 담당하며 한국축구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일조를 했던 축구협회 오완건 부회장(75)이 최근 부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중동고와 연세대 시절 팀의 주장으로서 많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던 오 전부회장은 대학 졸업 후 한국유리에 입사, 축구와 잠시 연을 끊었다.
그러나 주위의 요청에 의해 결국 다시 축구계로 돌아왔고, 당시 축구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장점을 살려 이후 대한축구협회의 국제관련 업무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1970년대부터 수많은 국제대회에 대표팀을 이끌고 단장으로 참가했으며, 아시아 축구연맹(AFC)에서도 30년간 각종 분과위원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부터 2002년까지는 FIFA 올림픽 분과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각종 사건에 쓴소리를 많이 하고 파이프 담배를 좋아하는 그를 두고 국제축구계에서는 “오 파이프(Oh Pipe)"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38년간 정들었던 축구협회를 떠나는 오완건 전 부회장을 만나 지난 세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축구협회 국제관계 일을 하시다가 최근에 그만두셨는데,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1966년에 축구협회에 들어왔으니 38년간 일한 셈이지요. 1982년부터 2002년까지는 FIFA에서 올림픽 분과위원으로도 일했고, AFC에서도 경기분과위원회, 상벌위원회 등 각 분과위원회에서 30년간 일하기도 했어요. 나름대로 보람있는 세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축구협회 부회장직을 그만두게 됐는데, 어떻게 보면 때늦은 감도 있어요. 우리 축구계에 훌륭하고 능력있는 후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 중동고와 연세대 시절 선수 생활을 하셨는데, 그 시절을 회고해 주세요.

처음에 축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충청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유순하고 내성적이었거든요.(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 태권도를 시작했는데, 주위에서 하도 말리는 바람에 무엇을 할까 고심하다가 축구를 택했죠.

축구를 하면 리더쉽도 생기고, 체력과 정신력도 강해진다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다가 중동고와 연세대에서는 주장까지 맡았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선수생활을 마쳤습니다.

- 축구를 그만두신 이유가 있으신지.

연세대 상과를 졸업하고 1957년에 한국유리라는 회사에 공채 1기로 입사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축구만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어서 평생 직장이 가능한 한국유리에 입사한 것이죠. 축구와의 인연을 끊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축구장에도 가질 못했어요.  연대 시절 축구부 주장을 했는데도 연고대 정기전을 구경하지 못했고,  보고 싶었던 외국팀이 와도 갈 틈이 없었습니다. 축구를 다시 하고 싶다는 충동을 많이 느꼈죠. 그러나 축구보다는 직장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았습니다.

- 1966년부터 축구협회에서 일하시게 됐는데, 그 계기가 있으십니까?

조금 복잡했죠.(웃음) 1966년 2월경이었을겁니다. 당시 최치환 씨가 축구협회장이셨는데, 그 분이 하루는 만나자고 합디다. 제가 축구선수 생활을 하긴 했지만 축구협회장을 직접 만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갔더니 축구계 대선배님들도 여럿 계셨는데, 최치환 회장님이 보자마자 “오늘 발표합니다”라고 그러시더군요. 제가 “뭘 발표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저를 총무이사로 임명한다지 뭡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은 회사일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조금 더 기반을 닦은 후에 축구계에 봉사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자리를 떴죠. 그리고 회사에 왔는데, 오후에 한국유리의 최태섭 사장님이 저를 부르시더군요. 알고보니 축구협회 최치환 회장님과 우리 사장님이 절친한 사이였어요. 저한테 부탁해서 안 되니까 사장님께 부탁을 하신 거였죠.

처음에는 거절을 했지만, 이틀 정도 지난 뒤에 사장님이 다시 부르시더니 “오 과장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축구계에서 필요하다고해서 부르는데 그것을 도와주는 것도 뜻깊은 일이네”라면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3월 1일부터 축구협회에 몸담았죠.

- 당시 선수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영어에 능통하셨다고 하던데, 특별한 배경이 있으셨는지.

과찬입니다. 연세대 상과에 입학했을 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씨가 1학년 초부터 영어를 가르치셨어요. 그 양반 학점을 4학년 마칠 때까지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싫으나 좋으나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 때 기초가 마련된 것 같습니다.

한국유리에 입사한 뒤에는 외자관계를 담당했는데 아무래도 업무상 영어공부를 많이 하게 됐습니다. 1960년에 회사와 관계있던 미국 회사에 견습생으로 파견되어 뉴욕에서 1년 정도 있었어요.
사실 뉴욕에서 1년 정도 지내다보니까 여기 온 김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회사에서 불러들여서 귀국했지요. 그런데 귀국하고 보니 5.16 쿠데타가 일어나서 사장님은 형무소에 계시고, 저는 매일 사장님 사식 넣으러 다니기 바빴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어쨌든 지금은 외국에서 공부한 축구 후배들도 많고,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없는 후배들이 많아서 뿌듯합니다.

- 1960년대 당시 축구협회의 사정과 국제축구무대에서의 위상은 어땠습니까?

사실 그때는 축구협회 사무실조차 없었습니다. 당시 대한체육회가 지금의 서울시청 맞은 편 플라자 호텔 근처에 회관을 갖고 있었지요. 그 회관의 작은 사무실 하나를 빌려 축구협회에서 사용하고 있었어요. 협회 직원도 2명밖에 없었어요.

외국과의 커뮤니케이션도 거의 안되던 시절이었고, 모두 대한체육회를 통해서 처리해야 했지요. 다행히 제가 한국유리 외자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의 텔렉스를 이용해서 외국 측의 연락을 받아 축구협회에 전달하고, 처리가 끝나면 다시 회신하고 그랬습니다. 나라 전체가 어렵던 시절이다 보니 그 정도의 시스템밖에 안되어 있었지요.

-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했었죠. 그리고 이에 앞서 열린 FIFA 총회에 북한 측 대표와 함께 참석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지난 이야기니까 하겠습니다.

1966년에 제가 축구협회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축구 업무로 외국에 나가게 된 거였지요. 하루는 협회 이사회를 한다고 해서 갔는데, 갑자기 회장님이 저보고 FIFA 총회에 한국대표로 나가달라는 거예요. 저로서는 회사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요. 김용식 선배님도 가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랴부랴 대한체육회에 알아봤더니 각 종목의 국제 총회에 참석하는 단체에 대해서는 1명에 한해서만, 그것도 왕복여비만 제공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자비로 가게 될 상황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경비가 워낙 많이 드니까 런던까지 자비로 가서 숙박하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김용식 선배님은 대한체육회에 가서 돈을 타서 그거라도 같이 나눠서 가자고 하셨는데, 저는 “그럴 것 없이 김 선배님 비행기 표만 사서 가십시오. 만약 제가 가게 된다면 런던 어디서 만날 것인지 그것만 저한테 적어보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김용식 선배님은 대한체육회에서 제공한 왕복여비에다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었던 김성곤씨에게 약간의 지원을 받아서 먼저 런던으로 출발했습니다. 김용식 선배님과 김성곤 회장이 학교 동기동창이어서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지요. 김 선배님이 떠나시고, FIFA 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축구협회에서 런던 갈 경비를 줄 생각을 안하는 거예요.저도 그냥 버텼지요.(웃음)
제가 계속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축구협회에서도 당황하기 시작했지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에 “경비를 주시든지, 아니면 저희 회사 사장님에게 이야기하고 보내주셔야지, 발표만 하고 경비를 주시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갑니까. 안가겠습니다”라고 버텼어요.

그때는 이미 FIFA에 제 이름이 총회 참가자 명단에 등록이 되어 있었던 터라 축구협회 회장님이 당황했어요. 그래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후락씨였던 것 같은데 그 양반한테 갔다오더니 얼마 받아왔다고 주시더군요. 그것이 런던까지의 항공료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어요.
그 돈을 가지고 회사에 가서 사장님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사장님께서 “ 회사에서 출장 가는 것으로 해 줄테니 일단 갔다 와라”라고 하셔서 런던으로 가게 됐지요. 그렇게 해서 제가 FIFA 총회를 통해 국제축구계에 데뷔하게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런던에 가서 김용식 선배님을 찾았는데, 런던 시내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한 개인주택의 방을 빌려서 계시더군요. 적어도 FIFA 총회이면 세계 각국의 대표들은 회의가 열리는 호텔에 묵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그 때 재정상태가 워낙 열악했던 탓에 그렇게 멀리 떨어져 묵고 있었던 겁니다. 가슴 아프고, 씁쓸했지요.

어쨌든 총회가 시작됐는데, FIFA에서는 의도적으로 분단국들을 같은 테이블에 앉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됐고, 동독과 서독, 월남과 월맹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북한에서는 축구협회장을 서기장(지금은 전무 이사를 칭함)으로 부르던데, 어쨌든 그 분이 직접 참석했어요. 남한에서 월북하신 분인데, 저에게는 선배였고, 김용식 선배님한테는 후배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축구장에서도 남한에서 월북하신 분들을 몇 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총회를 통해서 국제무대에서의 우리의 위상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축구외교에서도, 축구실력에서도 북한에게 모두 뒤떨어지기도 했고...알다시피 그 대회에서 북한은 이탈리아를 꺾는 등 이변을 일으키며 8강 진출이란 신화를 달성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지요.

- 1970년대 이후 수많은 국제대회에 대표팀 단장으로 나가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들이 있으신지요?

제가 대표팀을 이끌고 그렇게 많이 해외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축구인으로서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주 해외에 나가게 됐습니다.

외국에 나가보니까 우리가 너무 뒤떨어졌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축구 그 자체만으로는 아시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지만, 축구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떨어졌어요. 일단 국제무대에서는 영어를 해야 하는데, 그 동안 제대로 영어를 구사하는 분들이 많이 없었지요.
그러다보니까  때로는 심판들로부터 불이익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 제가 대회때마다 축구인으로서, 단장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행동도 많이 했지요.(웃음)

이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일단 기억나는 대회는 1967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가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청소년대표팀 단장과 68년 아시아 청소년대회 유치 등 2가지 목적을 위해 가게 됐어요.

그 시절만 해도 선수들의 수준이나 기량이 평준화되지 않았어요. 몇몇 중심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이 구성되었는데, 그 선수들이 말썽이 나니까 팀이 그대로 무너져버렸지요.
한 선수는 비행기에서부터 멀미를 하더니 도착한 뒤에도 열이 나고 그래서 결국 시합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축구협회 전무인 노흥섭 선수도 믿었던 선수인데 첫 경기에 들어가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다리 골절로 못 뛰게 됐습니다. 심지어 어떤 선수는 20분도 채 뛰지 않고, 손을 들어 교체해달라고 그랬지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더워서 못뛰겠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래서 예선탈락하고 말았지요. 지금은 탈락하면 바로 그 다음날로 비행기 타고 돌아올 수 있지만,  당시에는 항공편이 부족해서 그러지도 못했어요. 결국 방콕에서 며칠 있었는데, 식사 때마다 다른 팀 선수들을 봐야하니 선수들은 풀이 팍 죽어 있었지요. 눈치도 보이고...

국제 대회에 나가 예선 탈락했으니 한국에서 난리가 나야했는데, 다행히 1968년 아시아 청소년대회 유치에 성공해서 만회가 됐었지요.

그리고 1971년 도쿄에서 열렸던 아시아 청소년대회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 청소년대표팀 멤버는 막강했지요. 차범근을 비롯해 김진국, 황재만, 김호곤 등 쟁쟁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8강에서 이란, 준결승전에서 일본과 각각 붙었는데 모두 승부차기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지요.

그런데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팀의 주축인 차범근 선수가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결승전에 나오지 못했어요. 결국 이스라엘과의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해 우승컵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차범근 선수의 부상만 없었어도 우승을 차지했으리라 생각해요.

사실 그 대회에는 당시에는 살벌했던,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재미있었던 일이 있어요. 결승전에서 이스라엘과 붙었는데, 경기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임원들과 우리 임원들이 운동장에서 격투를 벌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웃음)

예선에서 이스라엘과 한번 붙었는데, 그때는 무승부를 기록했어요. 결승에서 다시 만나 팽팽한 경기를 펼치는데, 약 30분 정도를 남기고 우리가 1골을 허용했지요. 그 당시에는 선수가 운동장에 넘어져 있으면 무조건 그 선수가 터치라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이기고 있던 이스라엘 선수들은 계속해서 넘어지면서 시간 끌고, 우리 선수들은 더욱 다급해졌어요. 그래서 우리 선수 하나가 화도 나고 급하니까 넘어져 있는 이스라엘 선수를 터치라인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벤치에 있던 이스라엘 임원이 뛰어 들어가고, 그렇게 되니까 우리도 박경화 코치가 뛰어나갔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임원이 박경화씨를 무릎으로 가격하더군요. 그것을 보고 가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나도 뛰어 들어갔고, 이스라엘 임원들도 달려오면서 한바탕 패싸움이 벌어졌죠. 그 때만 해도 제가 팔팔했어요. 공중으로 붕 떠서 이스라엘 임원 얼굴에 발차기를 했지요.(웃음)

또한 당시에는 버마(현 미얀마)가 제일 강했는데, 버마도 이스라엘과 붙으면 매번 싸움이 나곤 했어요. 그렇게 되면 징계위원회가 열리는데 저는 주로 버마 편을 들었죠.
그래서인지 패싸움이 일어나자 버마 선수들이 우리편에 가세해 이스라엘 선수들과 싸웠습니다. 일본과 3/4위전을 치르고 결승전을 구경하면서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뭐..재미있는 이야기야 끝이 없지요.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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