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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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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김진규, “김태영의 뒤를 이을만한 파이터형 수비수”

내가 아끼는 선수 중 하나인 진규..
근성과 파워로 무장한 수비수..^^
인간적으로도 털털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다..
주빌로에서 잘해주길~

2004년 5월 7일 KFA 홈페이지 인터뷰...


2003년 UAE에서 열렸던 U-20 세계선수권 16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아쉽게 역전패를 당했다.

모두들 그라운드에 주저앉았고, 그 중에서 팀의 막내였던 김진규(당시 18세)는 그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라운드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김진규의 모습과 그를 위로하는 박성화 감독의 모습은 TV로 생생히 전달되어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김진규는 팀의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전 게임에 선발출장하며, 특유의 강한 승부근성과 파워를 기본으로 한 끈질긴 대인마크를 선보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강한 다리근육에서 뿜어나오는 파괴력 만점의 중거리슛 역시 김진규의 트레이드 마크. 때로는 투지가 지나쳐 위태위태하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진규가 가진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후 김진규는 올림픽대표팀에도 선발되는 등 나이를 뛰어넘는 활약으로 차세대 국가대표팀의 수비수감 중 하나로 축구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사실 여러 면에서 김진규는 팀선배인 김태영과 흡사한 면이 있다. 김진규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꼽는 김태영은 전형적인 ‘파이터’형 수비수이다. 상대를 넘어뜨릴망정 뚫리지는 않겠다는 강한 승부근성과 터프하고도 강력한 수비는 김태영만의 전매특허. 세련된 맛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축구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강렬함을 느낄 수 있어 매력적이다.

김진규 역시 마찬가지. 결코 지고는 못사는 스타일이다. 수비수로서의 파괴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사실 젊은 시절 너무 투박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던 김태영에 비해 김진규는 아직 19세의 어린 나이와 ‘수비의 스페셜리스트’ 박성화 감독 밑에서 2년여간 단련받은 전술 이해도를 놓고 볼 때, 보다 진화된 형태의 파이터형 수비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절대 지고는 못살죠. 형들과 게임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몸이 정상이 아닐지라도 결코 지면 안돼죠. 다리라도 걷어차야지 나를 뚫고 그냥 지나가게 만들지는 않았어요.”

“킥이나 헤딩, 승부근성 같은 면이 저의 장점이라고 많이 이야기해요. 다만 성격을 좀 죽일 필요는 있어요.(웃음) 물론 이것이 수비수로서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수비수는 침착해야 하거든요. 항상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경기에 임하는데도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좀 더 수양이 필요한 것 같아요.(웃음)”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김진규가 처음 축구를 시작한 것은 경북 영덕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상당수의 축구 선수들이 그러하듯 간식 먹는 재미로 축구를 시작했다.

영덕초등학교 시절 수비를 맡았던 김진규는 강구중에 진학하면서부터 공격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그리고 안동고 2학년까지 계속해서 공격수로 활약했다. 수비수로 자리를 옮긴 것은 2학년 말.

사실 공격수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수비수로의 포지션 변경은 김진규 본인으로서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진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제가 축구로 성공한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축구가 좋아서 한거에요. 공격하라고 하면 공격하고, 수비하라고 하면 하는거죠.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 좋았으니까요.”

“초등학교 시절 수비를 봤던 경험이 있고, 제가 킥력이나 헤딩력, 파워가 되니까 감독님께서 수비를 보라고 하신거죠. 고등학교에서는 일단 성적이 중요하고, 당시 우리팀의 수비가 조금 취약했거든요.”

실수에 대한 부담감이 적은 공격수에 비해 수비수는 한번의 실수가 바로 팀의 패배와 직결된다. 그만큼 심적인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진규는 그런 상황을 즐기는 편이다. 거물로 자랄 수 있는 배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

“공격수와 수비수의 심적인 부담감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죠. 공격수는 못하더라도 1골 넣으면 스타가 되잖아요. 수비수는 실점 자체가 자기 실수죠. 공격수가 수비수를 앞에 두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수비수는 공격수의 의지에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 힘든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제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그런 긴장감, 부담감을 즐기는 편이에요. 상대의 에이스 공격수를 1:1에서 막아낼 때의 기분은 수비수가 아니면 모르죠.(웃음) 반면 상대 공격수와의 대결에서 지면 열받는 것이고...만약 우리 팀이 무실점으로 승리했다 하더라도 내가 몇 번의 실수를 했을 경우에는 분을 참지 못해요.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실수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보다 강한 상대라면 그 실수를 골로 연결시켰을 것이고...”

안동고 시절 - 단짝 콤비 백지훈과 팀을 고교정상에 올려놓다.

안동고에 진학한 김진규는 고교 시절부터 현재 전남에 이르기까지 줄곧 한솥밥을 먹고 있는 백지훈과 호흡을 맞춰 팀을 고교 정상에 올려놨다.

1,2학년 시절이었던 2000년과 2001년 선배들을 도와 백록기 전국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팀의 주축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2002년 3학년 시절에는 부산 MBC배 전국고교선수권에서 우승을 이끌며 안동고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특히 부산 MBC배에서 김진규는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5골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부산 MBC배 같은 경우 제가 축구하면서 그렇게 잘해본 적이 없어요. 예선전부터 골을 넣어서 총 5골을 뽑아냈죠. 첫 골은 중거리슛이었고, 2번째는 페널티킥, 3번째는 프리킥이었어요. 4번째와 5번째는 공격으로 올라가서 골을 넣었죠. 수비를 보다가 팀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공격에도 올라가곤 했거든요. 힘과 헤딩력이 있으니까 팀이 지고 있을 경우 올라가서 해결하는거죠. 아마추어에서는 이런 것이 통해요.”

“(백)지훈이와는 호흡이 정말 잘 맞았죠. 지금까지 단짝이에요. 당시 안동고의 플레이는 지훈이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저도 볼을 잡으면 바로 지훈이에게 줬어요. 일단 주면 지훈이가 만들어서 나가니까요.”

박성화 감독의 청소년대표팀에서 수비를 배우며 일취월장하다.

안동고에서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김진규는 박성화 감독의 눈에 띄어 2002년 U-19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다. 그러나 처음 합류한 U-19 대표팀은 순탄하지 못했다. 예전 U-16 대표상비군에 소집된 이후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한 김진규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처음 소집되어 훈련하다가 도망쳤었어요.(웃음) 모든 것이 낯설었고, 연습게임을 뛰어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죠. 도망치면서 마음속으로 이제 다시는 안뽑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박성화 감독님께서 다시 부르시더라구요. 너무 고마웠죠.”

박성화 감독의 부름으로 다시 대표팀에 복귀한 김진규는 마음을 가다듬고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는 4백 수비에 대한 적응력 역시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일반적인 상비군과는 급이 다른 대표팀이잖아요. 열심히 해서 많이 배운다는 생각이었어요. 4백 수비의 경우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태어나서 4백이란 것을 서본 적이 없었거든요.”

김진규에게 있어 이 시기는 수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 축구인생에 있어서의 터닝포인트였다.  수비조직을 일구는데 있어서는 국내 최고로 평가받는 박성화 감독은 어린 선수들에게 4백 수비라인을 운용하는 법을 철저히 단련시켰고, 김진규 역시 이전에 비해 일취월장했다. 더군다나 그 연령에서 국내 최고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모인 대표팀인 만큼 보이지 않는 경쟁심 역시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수비에 관한한 박성화 감독님이 최고이신 것 같아요. 감독님께 수비에 대해서 정말 많이 배웠죠. 4백 수비의 경우 처음이었는데, 감독님으로부터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수비대형을 세워놓고 볼이 이리로 오면 이쪽으로 라인을 당기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라인을 당기는 등 수비조직을 운용하는 법을 자세하게 배웠어요.”

“학교에서도 프로식에 가까운 훈련을 많이 받았지만, 대표팀에서는 또 달랐어요. 외국에서 공부를 하셔서인지 그 쪽의 훈련기법들을 많이 도입하셨는데, 훈련 자체는 강도가 무척 셌어요. 그런 훈련 속에서 강한 동료들과 몸을 부딪치고, 또한 외국팀들과의 경기경험까지 얻어서 다시 고교대회에 출전하면 느낌이 정말 달라져요. 예전에는 나름대로 힘들었던 상대들도 전부 저보다 한 수 아래가 되더라구요. 제가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어 정말 기분이 좋았죠.”

김진규는 이런 과정을 통해 단순히 파워 넘치고 터프한 수비수에서 한 단계 성장했다. 전체적인 수비라인을 생각할 줄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알게된 것이다.

“아직까지 4백에 대해 완벽하게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팀에 가서 경기를 뛰더라도 4백 시스템이면 ‘아,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 상황에선 저렇게 대처해야지..’ 이런 것들이 딱 나와요. 자신감이 생긴거죠. 박 감독님께 2년여를 배우면서 그만큼 수비를 체계적으로 배웠어요.”

사실 김진규는 청소년대표팀 시절 박성화 감독에게 가장 많이 야단을 맞은 선수 중에 하나였다.
연습게임이나 훈련시 박 감독은 김진규의 잘못을 수없이 지적하곤 했다. 그러나 박 감독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김진규에 대한 애정이 깊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김진규를 대하는 박 감독의 모습을 보면 흡사 장난꾸러기 아들을 지켜보고 나무라는 아버지같다고나 할까. 김진규 역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2년여 동안 정말 혼도 많이 났죠. 그렇지만 제 성격이 그런 것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그런 성격이 아니에요. 감독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 자체로 인정하고 끝이죠. 잘못된 부분을 운동장에서 고치면 되는 거니까요.”

U-20 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불의의 부상으로 탈락하다.

김진규가 1년여 동안 고된 훈련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10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U-20 아시아선수권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했던 이 대회를 앞두고 김진규는 불의의 부상으로 눈물지어야 했다.

출국을 이틀 앞두고 열린 안양(현 FC 서울)과의 연습경기에서 발목부상을 당한 것. 이전에 발목을 다쳐 재활훈련을 한 바 있는 김진규는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며 결국 최종엔트리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울면서 파주 NFC를 나왔어요. 이 대회를 목표로 1년 동안 정말 고생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대회를 바로 앞에 두고 부상을 당해 나가야하니 심정이 어떻겠어요. 사실 추석 전에 발목을 다쳐서 추석연휴 동안 휴가도 못나가고 재활을 했었어요. 아시아대회를 위해서죠. 몸이 회복되어서 한번 테스트해보려고 뛰었는데, 처음에 몸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점프해서 헤딩하고 떨어지는 순간 발목이 돌아갔어요. 떨어지는 순간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그때 상황이 지금 생각하면 황당해요. 감독님께서는 (김)치곤이 형이 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잘못 알아들었던 거예요. 치곤이 형한테도 물어봤는데, 자기도 제대로 못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제가 뛴다고 했죠.(웃음) 그날 짐을 챙겨서 학교로 돌아갔는데, 가면서 계속 울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렇게 나가야하나라는 생각에...”

대망의 U-20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불의의 발목 부상으로 아시아선수권을 눈앞에서 놓쳐야 했던 김진규는 절치부심, 2003년 11월에 열리는 세계선수권을 준비했다.
최종 엔트리를 정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선수들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발탁과 탈락의 갈림길에서 선수들은 긴장해야 했다. 김진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내가 과연 최종 엔트리에 뽑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최종 엔트리 발표 얼마 전에 있었던 남북 친선경기에서 뛰지 못하고, 한일전에서는 (임)유환이 형과 뛰긴 했지만 제 생각에는 별로였거든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요. 다른 형들이 저보다 잘하는 것 같고...”

“그리고 마지막에 있었던 수원컵에서도 경기는 뛰었지만 역시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고, 감독님에게 지적도 많이 받았죠. 그래서 힘들겠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수원컵이 끝나고 최종엔트리 발표한다고 감독님이 전부 외박 나가라고 하더라구요. (이)호, (오)범석이와 함께 신촌을 돌아다녔는데, 세명 모두 최종엔트리에 뽑힐지 말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어요. 서로 이야기하면서 정말 축구하기 힘들다, 이렇게 가슴 졸이며 해야하냐 등등의 이야기를 했죠.(웃음)”

“다음날이 발표였는데, 너무 궁금해서 주무였던 축구협회 (조)준헌이 형에게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어요. 명단 나왔냐고 물었는데, 준헌형이 ”너희들 전부 뽑혔어“라고 말하시더라구요. 정말 기분 좋았어요. 그때 이호 집에서 묵고 있었는데, 당장 운동을 시작했어요. 전날 쉬었으니까 다시 컨디션 끌어올리려구요. 저랑 호, 범석이, (여)효진이 형 이렇게 4명이 특히 친하게 지냈는데, 범석이와 효진이 형에게도 전화해서 전부 뽑혔으니 운동하라고 했죠. 열심히 운동해서 우리 베스트멤버로 뛰자고 그랬죠. 결국 모두 세계대회에서도 많은 시간 경기를 뛰었죠. 우리끼리 모여서 경기에 뛰면 이렇게 주고, 저렇게 움직이고..이렇게 하자라고 전술구상도 많이 했어요.(웃음)”

“이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말하자면 얘랑은 예전 16세 상비군에 있을때부터 친했어요. U-20 대표팀 훈련할때도 룸메이트였구요. 원래 서울 사람들이 조금 깐깐하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부분이 있는데, 그 녀석은 경상도 사나이인 저와 성격이 비슷해서 잘 맞아요.(웃음)”

“2002년 봄에 청소년 대표팀이 스위스와 독일로 전지훈련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저희는 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당시 이호랑 둘이서 저녁에 나와 ”우리 진짜 열심히 하자. 그래서 감독님에게 우리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주자“라고 다짐한 적이 있었어요. 이후 정말 열심히 훈련했고, 최종엔트리가 발표된 이후에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결과 세계대회에서도 뛸 수 있었죠”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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