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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FA 사람들] 경기국 이상호 부장 ②


2005년 4월 13일 인터뷰..

각급 대표팀의 온갖 일을 처리하는 살림꾼 역할을 해야 하는 주무가 지금은 KFA의 대외협력국 내 대표팀 지원부 소속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주무는 경기국 직원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코스였다.

물론 지금 대표팀지원부 소속인 김대업 대리(국가대표팀, 올림픽대표팀)나 차영일, 여세진 씨(유소년 대표팀 및 여자대표팀 등) 등도 경기국 출신.

이상호 부장 역시 경기국에 들어오자마자 92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의 주무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크라머 감독이 물러나고 김삼락 감독-김호곤 코치 체제로 운영되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팀 운영이 상당히 열악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무는 거의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해야만 했다.

“그때는 협회 재정이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김삼락 감독님과 김호곤 코치, 선수들과 나..이렇게만 전지훈련을 다녔던 적도 있었어요.(웃음) 오죽했으면 올림픽 본선에서도 주무는 못따라갔어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기 때문에 거기서 인원을 줄이라고 하다 보니까 내가 잘린거죠.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대신 대한체육회 직원이 주무역할을 해준다고는 했는데, 선수단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한 것이 있었죠.”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 시절의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에 이 부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로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만한 사건들이 여럿 생각났기 때문이다.
첫번째 기억나는 사건으로 이 부장은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당시 있었던 애국가 사건을 꼽았다.

“유럽 전지훈련에서 오스트리아를 들렀죠. 오스트리아 1부리그 3위팀과 친선경기를 했는데, 경기 전에 국가를 틀어야하니까 내가 경기장 관리인에게 애국가 테이프를 줬거든요. 그리고 양팀 선수들이 도열한 가운데 원정팀이 우선이니까 애국가를 틀었어요.”

“그런데 나와야하는 애국가는 안나오고, ‘쾌지나 칭칭나네’가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테이프 앞면을 틀어야 하는데, 뒷면을 틀었던 거예요. 김삼락 감독님은 거의 눈이 틔어 나오기 직전이고, 선수들도 어리둥절하는데..정말 눈앞이 하얗더군요.(웃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기장에 한국인이라고는 우리 코칭스태프와 선수들밖에 없으니까 아무도 이게 잘못된 지 모르는 거예요.  그때 단장이 심명섭 선생님이셨는데 애국가보다 더 좋다고 농담하셨죠.  선수들이 놀란 것을 상대팀에서는 흥에 겨워서 그런 줄 알고...(웃음) 어쨌든 그 다음부터는 테이프 앞뒷면을 모두 애국가로만 넣고, 다른 곡은 전부 지우라고 다른 주무들에게도 꼭 이야기하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역시 바르셀로나 올림픽팀이 체코 전지훈련을 갔을 때 에피소드.
“체코 프라하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데, 프라하에 내리니까 선수들 짐이 안왔지 뭡니까. 공항이나 항공사에서 이번에 짐을 못 보내면 다음에 보내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한테 통보를 안해준 거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대한항공에서 일했던 것이 축구에도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상황을 보니까 항공사 직원들이 흔히 ‘웨이트 밸런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 상황이었거든요. 조그만 비행기로 이동하다보면 짐을 많이 못 싣는데, 그럼 일부는 다음 편에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승객한테 절대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환불이나 취소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웨이트 밸런스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엉뚱한 곳으로 갔으면 더 큰일이죠. 물어봤더니 맞다고 하면서 공항 직원들이 웨이트 밸런스를 어떻게 아냐고 되묻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항공사 측에서는 선수단 짐이 다음 날 저녁 5시에 온다고 하는데, 올림픽대표팀의 경기는 다음 날 3시였다.

결국 비행기편을 알아본 이 부장은 그날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고, 다음 날 오전에 쾰른에서 프라하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내일 오전까지 짐이 도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기를 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으로, 쾰른에서 프라하로 짐을 싣고 오게 한 겁니다. 김삼락 감독님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 보시길래 설명을 드리고 내일 아침까지는 짐이 올 거라고 말씀드렸죠.”

“그날 밤 숙소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생각해봐요. 그 상황에서 잠이 오겠나..(웃음) 다음 날 아침에 트럭을 타서 공항에 갔고, 9시에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죠. 공항 짐 나오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없으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어요. 한참 기다리는데 기다리던 그 짐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와 얼마나 반갑던지...(웃음)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국가대표 주무 시절 이야기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 주무를 거쳐 이 부장은 국가대표팀 주무로 활동을 시작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지금처럼 대표팀 지원 업무가 분화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무는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수퍼맨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 부장 역시 수퍼맨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요즘 주무들이 여전히 힘든 점이 있긴 해도 불평을 하지 못해요. 지금도 많은 일들을 하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일을 주무가 혼자 도맡아했기 때문이죠.”

“때에 따라서는 나도 사람인데 화가 나는 경우가 있죠. 한번은 해외전지훈련을 갔는데, 선수단 짐이 250개쯤 됐어요. 입국수속하는 곳에서 공항 직원들이 선수들에게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선수들이 나를 찾았거든요. 그래서 미리 나온 (고)정운이와 (김)현석이에게 짐을 체크해달라고 부탁하고, 입국수속하는데 가서 대신 설명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감독님이 왜 짐 체크를 선수들에게 시켰냐고 나무라더군요. 솔직히 억울하고 섭섭하죠.”

“그리고 나서 호텔에 낮 12시에 도착했는데,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방 배정을 받고 피곤하니까 자러갔어요. 나는 그 때부터 현지 축구협회 사람들과 훈련장과 경기 등 1주일 훈련 계획을 의논하고, 현지 주방장과 함께 우리는 어떤 식의 음식을 원하니 이렇게 준비해달라는 의견교환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오후 늦게 식사 시간이 되었어요.  선수들이 식사하러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불만들을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화가 나더군요. 지금까지 나는 쉬지도 못하고 계속 현지인들과 협조를 구하고 있었는데...  주무의 고충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그때처럼 들던 때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주무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온갖 잡무를 다 수행해야 한다. 특히 해외에 나가면 예상치 못했던 돌발변수들이 반드시 발생하기 마련이다.
“1996년이었던가요? 그 때도 황당한 사건이 있었죠. 3월에 중동에서 열리는 대회를 앞두고 크로아티아와 친선경기가 예정되어 있어서 크로아티아로 갔죠. 중동대회에 가는 것이라 전부 여름옷을 준비해서 갔는데, 크로아티아에 갔더니 눈보라가 치더군요.(웃음)”

“선수들 방한복을 사주려고 시내에 나갔는데, 예산상 개인당 25불 이내에서 맞춰야 했어요. 도저히 세트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운동장에 가보니까 땅이 질퍽하고 잔디가 길어서 선수들이 긴 스터드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현지 프로팀들을 돌아다니며 긴 스터드를 구해서 조여주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이 부장이 국가대표팀 주무를 마지막으로 했던 96 아시안컵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기억.
성적 부진을 이유로 박종환 감독이 물러날 때 이상호 부장도 함께 대표팀 주무를 그만두고 국내경기업무로 복귀하게 된 대회다.

“8강전에서 이란에게 2-6으로 대패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가 그렇고 어쨌든 실력으로 그렇게 대패할 것은 아니었는데 아쉬움이 크죠. 그래도 그 한 게임졌기 때문에 박종환 감독님도 경질될 거란 생각을 안했어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감독님이 ‘내년 1월 3일 집합하자’고 하셔서 ‘내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5일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고 의견을 드리자 ‘그럼 5일로 하지’ 이러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박종환 감독이 그만두면서 후임으로 차범근 감독이 오게 됐고, 나도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싶어서 김정훈 차장(현 심판실)에게 주무 역할을 넘겼죠.”

기억나는 선수들

축구협회 입사 전부터 서정원,이태호 등과 인연이 있었던 이 부장은 이후 13년간의 축구협회 생활, 더군다나 경기 현장에서 근무했기에 여러 선수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이태호, 변병주, 박경훈 이런 선수들이 있었던 80년대 후반 대표팀 선수들과는 다 잘 알죠. 그때는 대한항공 승무원 시절이었는데, 내가 일부러 대표팀 비행기를 지원해서 거의 같이 다녔으니까..(웃음) 경훈이 같은 경우는 경훈이 아내가 승무원 출신으로 나와 비행을 많이 다녀서 또 인연이 있었죠.”

“그러고 보니 경훈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억도 있군요. 경훈이가 포철에서 은퇴하고 아내와 같이 축구협회에 인사하러 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포철에서 1년간 독일유학을 보내준다고 해서 준비 중이라고 해요.  그래서 영어도 배울 겸 독일보다는 영국이 낫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줬죠. 그리고 1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만약 포철이 한달에 300만원씩 1년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면, 150만원씩만 써서 2년 있어라. 2년 정도 있으면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5년 정도 있으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결국 경훈이가 그 말을 받아들여 영국으로 갔고, 전화통화도 가끔 하고 그랬죠. 그런데 2년 정도 지났을 때 전화가 왔는데, 전남에 프로팀이 생기는데 코치로 오라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 정도면 어차피 언제 한국에 돌아와도 자리가 있으니까 솔깃하지 말고 더 있으라고 했습니다. 경훈이가 알았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때 경훈이가 이미 공항에 들어와서 전화를 했던 거예요.(웃음) 귀국하는 길에 이태호, 변병주랑 술 먹기로 약속을 해놓고, ‘상호형도 부르자’ 이렇게 이야기가 되서 전화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오지 말고 거기 있으라고 전화를 하니까 경훈이도 차마 한국에 왔다는 이야기를 못했던 거예요.(웃음)”

이후 올림픽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주무를 거치면서 많은 선수들과 친분을 쌓은 이 부장이지만,  유난히 기억나는 선수들은 1990년대 초반 유소년 상비군이었던 멤버들.  최태욱,조병국,전재운 등 아테네올 림픽대표팀 주역들이 바로 그들이다.

“걔네들이 초등학교 시절이죠. 그리고 걔들 1년 후배가 김두현이었고...두현이 같은 경우 그때 동두천초등 다니던 시절인데, 그때부터 리프팅하는게 대단했어요. 정말 안정되어 있었죠.  인천 만수초등 다니던 태욱이도 마찬가지였고...”

“애들의 리프팅 자세가 굉장히 안정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리프팅을 할 때에는 공이 공중에서 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야 좋은데,  정말 그렇게 하더군요. 지칠 때까지...(웃음) 자체 연습게임도 하고, 초청강사로 이태호,변병주,박경훈 등과 함께 차범근 감독도 부르고 그랬죠. 당시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자신들의 우상이니까..”

“두현이는 기초가 참 잘되어 있는 선수였는데, 몸이 허약했어요. 집안 사정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어서 두현이 아버님이 걱정스러워 전화도 하시고 그랬죠. 마침 고교 졸업하고 수원 삼성으로 간다고 하길래 처음 들었던 생각은 ‘거기 가면 잘 먹을 수 있겠다’였어요. 지금 두현이가 이렇게 잘 커서 유명해져 있는 것을 보면 감개무량하죠.”

“그 밑 세대에 (김)영광이도 있었는데, 어렸을 때에는 체구도 왜소하고 다른 골키퍼들과 비교할 때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야무지고 빠르더군요. 해보겠다는 근성이 매우 뛰어났던 걸로 기억해요.”

“어쨌든 걔네들.. 그때는 정말 코 질질 흘리던 애들인데, 이제 대표 선수 되고, 프로선수 되어서 경기장에서 만날때마다 인사하는 걸 보면 기특하고, 세월의 흐름도 느끼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죠.(웃음)”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파견근무

1996년말 아시안컵이 끝난 뒤 국가대표팀 주무를 그만두고 경기국 본연의 업무로 복귀한 이 부장은 99년까지 국내 업무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2000년 3월 월드컵조직위원회로 파견되어 2002년 9월에 다시 복귀할 때까지 월드컵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월드컵조직위가 구성됐는데,  처음엔 축구협회에서 아무도 안 갔어요. 그래서 ‘월드컵과 관련된 것인데 축구협회도 파견을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나를 보내줘라’고 요구를 했죠. 월드컵과 관련된 세세한 부분까지 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 부장은 월드컵 조직위에서 경기 2부장을 맡았다. 경기 1부는 각 팀을 담당해 대표팀 연습장과 이동 스케줄 등을 관리하며 팀을 따라다니며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주임무였고, 경기 2부는 순수하게 경기운영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담당자들과 협의하는 등 경기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축구협회처럼 축구에 대한 전문가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효율성을 위해 그렇게 나눴어요. 나도 많은 것을 배웠죠. 월드컵을 처음 하다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줄 모르고 우리 대표팀 생각만 했는데, 훨씬 방대했습니다.”

여러 생각들

KFA에서의 13년. 이제 현장업무에 있어서 베테랑이 된 이 부장이지만, 모든 순간 행복하고 보람 있는 것만은 아니다. 축구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번쯤 생각하는 고민이 그에게도 있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축구계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차라리 그냥 손님의 입장에서, 그냥 운동장에 앉아서 관객의 입장에서 축구를 보고 즐길 때가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전처럼 큰 고민 없이 초등학교 선수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고, 그 선수들이 커가는 모습을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그런 재미라고 할까요”

“축구계라는 곳이 빠져들면 들수록 머리 아픈 것이 있어요.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축구인들이 순수하고 직선적인 반면에 우직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러운 분들도 있고, 단체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규정 위주로 가야하는데 인정 위주로 봐달라는 분도 계시고..그런 것으로 오해를 살 때도 있죠.”

“그래도 워낙 축구를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이 다음에 KFA를 그만두더라도 후회는 없겠다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에요.”

경기국 업무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보람은 항상 가져요. 경기국 업무라는 것이 축구경기를 사고 없이 잘 마무리하는 것이 1차 목적이기 때문에 일단 경기가 잘 끝날 때마다 항상 만족스럽죠. 여기에 1년에 10번 정도 있는 국제경기를 무사히 치르는 것도 큰 만족감이고...대회를 훌륭히 치렀을 때의 자부심도 크죠.  모두들 월드컵까지 치렀기 때문에 경기 운영에 있어서는 훤합니다.”

다만 이 부장이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KFA의 미래. 축구라는 스포츠의 비중이 점점 커짐에 따라 KFA가 해야할 일도 늘어나고, 예산도 증가함에 따라 이것에 대한 계획을 얼마나 짜임새있게 짜고 실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걱정이다.

“모든 계획을 좀 더 디테일하게 구상하고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만 나가면 좋겠지만, 만약 어느 순간 축구가 모질게 질타 받고,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면 KFA의 스폰서들 역시 자동적으로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개인적으로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예전 대표팀 주무 시절 팀이 구성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육사구장이나 코오롱 구장 등을 쫓아다니면서 연습장을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잔디 상태가 그리 좋지도 않은 구장이라도 쓸 수 있으면 감지덕지였죠. 그러다가 외국에 나가서 그 좋은 잔디구장들을 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파주 NFC가 완공됐을 때 너무 감동했어요. 지금도 가끔 파주에 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죠.(웃음) 그 외에도 전국에 최고 수준의 축구 인프라가 구축됐고, 앞으로도 구축될 예정이고...”

“이제 어린 선수들도 예전과는 달리 손쉽게 잔디구장을 밟습니다. 앞으로 KFA에서 강화해야할 부분은 지도자 부분이에요. KFA에서 해외연수도 보내주고, 교육에 신경쓰고, KFA의 도움으로 지도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유소년 축구에 일정 기간 봉사하는 그런 제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KFA 경기국의 베테랑 이 부장의 마지막 이야기이자 앞으로의 각오도 들어보자.

“경기국에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까지도 현실에 맞게끔 개선되어야할 규정이 많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개정이 필요해요.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쏟아져 나오는 은퇴 선수들을 KFA에서 그냥 방치할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해서 지도자 교육도 철저히 시키고, 초등학교부터 차근차근 맡아 지도자와 선수가 모두 발전하도록 만들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해요.”

“언제까지 축구를 위해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만둘 때까지 처음 축구를 좋아하게 됐던 시절의 열정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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