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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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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무 이야기>② 이해두 차장(4), "여자대표팀과 U-20 대표팀"
2003년 2월 18일 대한축구협회 홈피 기사...


94 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나는 당분간 주무일을 떠나 국내 각종 아마추어 대회 관장 등 경기국 내 다른 업무를 맡았다. 약 3년간을 그렇게 지내다가 1997년 무렵 여자대표팀 주무로 다시 복귀하게 됐다.

당시 여자대표팀은 축구협회 지원부 진형섭 부장님(당시 과장)이 맡고 계셨는데 지원국의 업무가 많아짐에 따라 경기국이 맡게 된 것이었다.

원래 여자대표팀 역시 경기국에서 관장해야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경기국 직원이 적은 상황에서 대표팀, 올림픽 및 청소년대표팀 주무를 맡기다보니 여자대표팀을 맡을 인원이 없었고, 결국 지원국에서 여자대표팀을 잠시 맡았던 상황이었다. 나는 1997년부터 2000년 전반기까지 여자대표팀 주무를 맡았다.

여러 면에서 달랐던 여자대표팀

지금까지 계속 남자팀만 맡다가 처음으로 여자팀을 맡아보니 색다른 부분이 많이 있었다. 남자 선수들의 경우 말도 잘하고 친해지기도 쉬웠던 것에 반해 여자 선수들은 내성적인 선수들이 많았고 내가 남자이다보니 친해지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코칭스태프,  이명화 주장과 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당시 여자대표팀은 이이우 감독님이 그만두시고 유기흥 감독님이 막 부임하셨을 시기였다.

유기흥 감독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독님이셨다. 선수들에게도 친딸에게 대하듯이 "얘야, 그렇게 하면 되냐.."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고 식사시간에도 "밥도 많이 먹고, 고기도 많이 먹어야 나중에 힘을 쓸 수 있어"라는 식으로 걱정을 하셨다. 정말 아버지가 딸을 대하듯이 선수들을 지도하셨다.

여자대표팀을 맡고 처음에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역시 경기력의 차이였다. 월드컵대표팀을 맡다가 여자대표팀을 맡고 나니 그런 부분의 차이가 컸다. 여자대표팀의 경우 중3이나 고1 정도의 남자팀과 연습경기를 하는데 그 팀들과의 경기에서도 지는 것을 보니까 굉장히 놀라웠던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이렇게 경기를 해서 해외경기에서 창피를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됐던 부분도 있었다.

유기흥 감독님의 이야기로는 남자팀과 경기를 해야 파워, 스피드, 공을 다루는 요령 등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축구하는 것에 대해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고 선수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이 스며들어 있는데 남자들과의 경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가 못할 것이 뭐 있느냐라는 생각을 갖게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전지훈련차 중국 곤명으로 갔는데 25일 정도 머무르면서 중국 여자 클럽팀들과 10회 정도의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시합내용이 괜찮았다. 10게임 중 6게임 정도는 이겼던 것 같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이 조금만 노력하면 여자축구도 세계무대에 진출하는데 어렵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다.

사실 훈련 외에 숙소생활, 선수들 장비 챙기는 것, 애로사항 등을 들어주는 일에 있어 주무가 여자였다면 더 섬세하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건강상태라든지, 가정이야기라든지, 여자선수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많이 제공해주고 같이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남자이다보니 선수들도 다가오기가 어려웠고 나 역시도 선수들 대하기가 머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초창기의 이런 벽들은 한 2년 정도 여자대표팀을 맡으면서 선수들과 친해지다보니 자연히 사라졌다.

언젠가는 선수들이 나보고 결혼했냐고 물었다. 내가 결혼했고 애도 있다고 그랬더니 대표팀 훈련 쉬는 날에 언니하고 애를 데리고 와보라고 그랬다. 원래 아내도 여자축구팀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상당히 가보고 싶어했는데 내가 선수들에게 방해될까봐 일부러 데려가지 않았었다.

선수들의 청에 의해 쉬는 날 식구들을 데리고 훈련장에 찾아갔는데 선수들도 즐거워했고, 아내 역시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고 "남자 선수들 못지 않네요"라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1999년 필리핀 아시아 여자선수권

내가 여자대표팀 주무를 맡았던 시기에 큰 대회라고 한다면 1999년 필리핀에서 열렸던 아시아 여자선수권을 꼽을 수 있다. 이 대회에서 1위부터 3위까지가 99 미국 여자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티켓이 주어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중국, 북한, 일본, 대만 등 총 15개팀이 참가한 이 대회는 3개조로 나눠 각 조 1위팀과 와일드카드 1팀이 4강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중국과 한 조에 속해 2-5로 선전하는 등 좋은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예선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전까지 중국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많은 발전을 보인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뛰었던 선수 중 이명화, 유영실, 차성미, 정호정, 곽미희, 진숙희, 송주희, 김미정 등의 선수는 아직까지도 국가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 대회에서의 또 다른 추억은 북한의 리성옥 심판에 관한 것이었다. 선수 출신인데 이명화 선수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명화 선수가 워낙 국제대회에 많이 나갔던 터라 리성옥 심판을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우리가 괌과 경기를 가질 때 리성옥 심판이 주심을 봤는데 이명화 선수가 "언니, 잘 알지..우리는 같은 동료야"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하자 웃으면서 "그래도 경기는 냉정한 거 아닙네까"라며 농담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그 전에 장비검사를 할 때도 선수들에게 일일이 잘하라고 격려해주기도 하는 등 따뜻한 동포애를 보여줬다. 리성옥 심판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여자심판으로 왔는데 경기장에서 만나자 굉장히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박창선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

축구협회가 1999년 신문로 축구회관으로 옮기면서 직원이 많이 늘어났지만 97년, 98년 당시만 해도 직원이 적어 겸직을 많이 했었다. 나 역시도 여자대표팀을 맡고 있었지만 남자 U-20 대표팀도 겸직했다. 여자대표팀 일정이 없을 때는 남자 U-20대표팀을 담당하는 식이었다.

나는 박창선 감독이 부임한 98년부터 같이 일하게 됐으며 아시아선수권까지 U-20 대표팀의 주무로써 일했다. 아시아선수권이 끝나고 사건이 있어서 박 감독님이 그만두시고 조영증 감독님이 부임하신 뒤 호주 전지훈련까지 갔다가 곽태호 대리에게 인수인계했다.
사무실을 너무 많이 비운데다가 여자대표팀 일도 있었고, 또한 94월드컵에서의 사건때문인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까지 가서 또 다치면 안된다라는 배려도 있었던 것 같다.

90년대 초 박상인 감독님 시절 잠시 U-20 대표팀을 맡은 바 있지만 어쨌든 대표팀을 오래 맡다가 청소년팀을 맡으니 선수들이 굉장히 순수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세대차이가 꽤 나서 선수들도 나를 형이 아니라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중에 내 직함이 과장이라고 하니까 그 때부터는 선생님이라고 호칭이 바뀌었다. 솔직히 쑥스러웠다.
당시 대표팀에는 (이)동국이, (김)은중이, (정)용훈이 등이 스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송)종국이, (설)기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창선 감독님은 워낙 대학감독을 오래하셔서 그런지 선수들을 잘 다루셨다. 그 방법이란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대신 운동장에서 호각을 잡았을 때만큼은 스파르타식으로 선수들을 강하게 휘어잡은 것이었다. 카리스마와 승부욕이 매우 강한 분이셨다.
선수들에게 해줄 것은 해주고 그 대신 자기 스타일에 맞춰 선수를 키워나가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98 태국 아시아선수권에 대비한 훈련

우리는 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에 대비해 제주도와 부산, 포항 등지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이 곳들이 날씨가 좋고 연습상대들이 많은 곳이기에 선택한 것이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프로팀인 부산, 포항의 2군, 그리고 동아대나 대구대 등의 지역 대학팀들과 주로 연습경기를 가졌다. 선수들은 베스트11에 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고, 당시 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학선수들의 경우 프로와의 연습경기를 통해 프로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더욱 열심히 플레이했던 기억이 난다.

박창선 감독이 노린 것도 이 2가지였다. 일단 경기력 측면에서 높은 레벨의 팀들과 경기함으로써 팀이 발전할 수 있으며, 또한 열심히 뛰어서 프로팀 관계자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겠다는 마음가짐을 유도, 결과적으로 선수들간 경쟁심을 끌어올려 팀 전체의 상승요인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무명이었던 설기현, 송종국

당시 대표팀의 스타는 일명 '프로 3인방'이라 불리우던 이동국, 김은중, 정용훈이었다. 이들이 팀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팬들도 가장 많이 끌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설)기현이나 (송)종국이는 스타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종국이나 기현이의 경우 정말 성실한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동국이나 은중이 같은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앞설 수 없다는 생각에 팀훈련 외에 개인훈련도 열심히 하고, 몸관리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또한 골키퍼 김용대의 경우도 처음에는 주전이 아니었다. 당시 주전은 한동진이었는데 기회가 올려고 했는지 연습게임을 앞두고 동진이가 감기몸살을 앓았다. 그래서 용대가 대타로 나갔는데 그 때 김성수 GK코치(현 올림픽대표팀 GK코치)의 눈에 들어 주전자리를 꿰찼다. 순간의 기회를 잘 잡은 케이스라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순간의 기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쨌든 기현이와 종국이의 경우 계속해서 성장, 이번 2002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쳐줘 나 역시 뿌듯하다.

1998년 태국 U-19 아시아선수권

1998년 10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은 이듬해 나이지리아에서 열리는 U-20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티켓이 걸려있는 중요한 대회였다.

대회가 열렸던 태국은 호텔 분위기나 차량 등이 노후화된 느낌이 있어 불만스런 부분은 있었다. 에어컨도 나오다가 멈추고, 엘리베이터도 중간에 정전되어 걸어서 내려오는 일이 발생하는 등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런 가운데서도 선수들이 비교적 적응을 잘 해줬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회를 앞두고 선수단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예전 90년대 초반 박상인 감독 시절의 청소년대표팀은 굉장히 여리고 해외에 나가보지 못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팀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소속팀과 같이 해외에 다 나가봐서 그런지 선수단 준비음식 이외에도 각자 알아서 좋아하는 음식도 가져오고, 해외에서의 국제대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이 대회는 5개팀씩 2개조로 나눠 상위 2개팀이 4강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는 일본, 중국 등과 함께 B조에 속했다. 예선 첫 경기에서 중국을 맞아 은중이가 2골, 동국이가 1골을 뽑아내며 3-2로 승리했고 예선 마지막 경기 일본전에서도 은중이와 동국이가 각각 1골씩 뽑아내며 오노 신지가 1골을 만회한 일본을 2-1로 격파, 순조롭게 4강에 진입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과의 4강전은 손쉽게 이길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의외로 고전했던 경기였다. 당시 경기가 열렸던 치앙마이의 경기장은 나이트 시설이 썩 좋지 않았다. 우리가 2번째 경기를 가졌고 저녁 6시 30분이 킥오프였는데 조명이 굉장히 어두웠다. 기현이가 내게 다가와 "너무 어두운 것 아니에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특히나 양 사이드 코너 쪽으로 가면 너무 어두워서 선수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이 원인이었는지 선수들도 좀 헤맸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는 고전 끝에 간신히 결승에 진출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조명 때문에 고전했던 우리가 조명의 도움을 받아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반 끝날 무렵 우리가 1-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종료 직전 기현이가 중거리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볼이었는데 어둡다보니까 실수를 했고 그것이 골로 연결됐다. 결국 승부는 연장에 돌입했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과 결승에서 다시 맞붙다.

카자흐스탄을 꺾고 결승에 진출한 우리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꺾은 일본과 우승컵을 놓고 맞붙게 됐다. 예선전에서 우리가 2-1로 이겼기 때문에 선수들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박창선 감독님은 결승전을 앞두고 "예선처럼 해라. 우승하면 더 좋은 것이지만 어차피 세계대회 출전권은 땄으니 부담없이 니네 편한대로 경기해라"라고 주문하시며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박 감독님은 역시나 벤치에 앉아계시지 못하고 일어서서 선수들을 독려하셨다. 그것이 감독의 본성인가 보다.

결국 결승에서도 우리는 은중이와 동국이가 1골씩 기록하며 일본을 2-1로 이기고 96년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우승하고 시상식에서 주장인 (김)건형이가 트로피 들고 굉장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즐거웠다. 건형이의 경우 맏형처럼 굉장히 무뚝뚝한 면이 있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우승의 감격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선수들과의 우승 뒷풀이

사실 결승전을 갖기 전에도 우리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과 교류를 가졌다. 세계대회에 동반진출한다는 것도 있었고, 월드컵 공동개최국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방에 놀러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 같았다.

결승전이 끝난 뒤에는 주장인 건형이가 와서 맥주를 좀 구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박 감독님께 허락을 얻고 맥주를 구해줬다.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과 유니폼도 바꿔 입고 맥주도 같이 마시면서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었다. 박 감독님도 이런 부분에 대해 풀어줬다.

사실 박 감독님은 국내에서도 대학생들은 그래야 된다면서 한번씩 이렇게 선수들을 풀어줬다. 큰 대회 끝나면 나이트클럽 같은데 룸 하나를 세놓고 선수들에게 노래도 부르게 하는 등 풀어줬는데 일본전이 끝난 뒤에도 그랬다.

주무로서 편했던 U-20 아시아선수권

개인적으로는 94월드컵에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다지 힘든 부분은 없었다. 또한 94월드컵 이후 혼자 나간 적이 없고 국제 주무와 같이 나갔기 때문에 더욱 편했다.

내가 세탁, 간식, 식사, 차량 섭외 등의 중요한 부분들만 챙기면 됐고, 코칭스태프의 의견을 듣고 선수들 뒷바라지하는 것만 신경을 쓰면 됐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때 느꼈던 것이 역시 국제주무와 팀 주무가 같이 나가야 일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국제대회에서 해야할 스케줄과 업무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7시에 경기가 있다고 하면 호텔에서 몇 시에 출발하고, 식사는 언제, 장비 챙기는 것, 아이스박스는 얼마나 필요하고, 선수들 맛사지 준비 등등...이런 것들을 모아서 회의하고 파트별로 나눠주는 역할만 하면 되니까 편했다.

당시 농담으로 국제주무로 따라갔던 이상락 차장(당시 과장)에게 "지금이라면 한쪽 눈을 감고도 하겠다. 식은 죽 먹기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상락 차장 역시 나에게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일을 착착 진행시키니까 우리들도 편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U-20 대표팀을 끝으로 주무일을 그만두고 2001년부터는 국내 대회 조율, 경기국 전체의 준비사항, 대회 스케줄 관리 등 행정쪽으로만 일했다.

맺는 말

주무라는 일이 힘든 일이지만 보람도 굉장히 많다. 선수들의 애로사항과 힘들어하는 부분들을 들어주고 도와주는 일, 그런 뒤 그 선수들이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뿌듯한 일이다.

일례로 90년대초만 해도 태극마크 달면 국가관을 중시하고 선수들도 이에 자극받을 때였다. 92년도에 인도네시아 독립기념배 대회가 있었는데 다른 나라들이 프로팀이나 국가대표팀이 출전했는데 우리만 U-19 대표팀이었다.

나에게도 그것은 해외 첫 출장이었는데 예전 체육심리 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나 일부러 애국가 테잎을 준비했었다. 선수들의 긴장감과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감독님의 허락을 얻어 운동장 도착 5분 전에 애국가를 틀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음악 듣고 농담하던 선수들이 애국가를 듣고 긴장하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각국의 프로팀이나 국가대표팀 사이에서 우리가 준우승을 차지하는 좋은 성과를 올렸다. 나 역시 팀의 좋은 성과에 자그나마 일조했다는 생각에 보람이 있었다.

주무일을 할 때는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이 있지만 막상 그 일을 떠나고 보니 그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주무생활을 하는 동안 팀이 좋은 성과를 얻어서인지 승운이 따르는 주무라고 불리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수들과 어울려 지낼 때가 좋았던 것 같다. 가정을 소홀히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는 집에 미안한 마음도 많았지만 지금은 다시 한번 해봤으면 하는 마음도 들 때가 있다. 특히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 때는...

끝.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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