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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은퇴 앞둔 김영주 국제심판, "떳떳하고 소신있게 심판생활을 보냈다"

2002년 12월 15일 대한축구협회 기사...


한국을 대표하는 심판으로 국제무대에 명성이 높았던 국제심판 김영주 씨(45)가 올해를 끝으로 현역 심판직에서 은퇴한다.

1987년 심판생활을 시작해 2002년인 올해 정년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김영주 심판은 1996년 아시안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997년 U-20 세계선수권 준결승전과 199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999년 컨페더레이션스컵, 2000년 북중미 골드컵, 2001년 월드컵 북중미 최종예선 및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심판으로 활동하고,  이번 2002월드컵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주심으로 활약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 심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

이렇듯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때까지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일단 김영주씨는 시작부터 축구선수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시작했다.
또한 국제심판으로 처음 선을 보인 1992년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단칸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겪기도 했으며 1996년에는 K리그에서 오심문제로 논란을 겪으면서 한동안 국내프로무대를 등지기도 했다.

그러나 15년간의 심판생활동안 매일 체력훈련과 상황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르지 않았고 다음날 운동에 지장이 있을까봐 맥주 한잔 마시지 않는 절제된 생활을 해왔다. 또한 국제심판으로서 보다 성공하기 위해 40세의 늦은 나이에 영어공부를 시작, 의사소통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연마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국제심판계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엄격하고도 소신있는 판정은 일본축구협회의 심판교재로도 쓰이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역 심판 은퇴를 눈앞에 둔 김영주씨를 만나 15년 심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 올해를 끝으로 15년간의 심판 생활을 마감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다. 1987년부터 15년간 심판생활 해왔는데 은퇴란 이야기가 나오니까 나 자신은 일단 믿어지지 않는다.(웃음) 어제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이런 때가 오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들이 "야! 너도 은퇴할 때가 곧 올 것"이라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15년간 심판생활을 해오면서 좀 더 원리원칙대로 강경하게 경기규칙을 시행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아직까지 경기장에서 우리 심판들이 규칙을 시행하는데 있어 강경하지 못해 나라도 좀 더 확고하게 경기를 진행했었다면 하는 후회가 든다.

- 다른 심판들에 비해 엄격하기로 평판이 높았는데도 그런 아쉬움이 있는가?

경기흐름이나 운영의 묘 등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면서 경기흐름을 끊지 않고 경기운영을 해나가는 것도 주심의 임무이다. 그러나 경기규칙을 시행함에 있어 좀 더 엄격하게 함으로써 선수들도 경기규칙이 이렇게 엄하구나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로 인해 경기진행이 좀 더 매끄러워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 처음 축구심판을 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다면.

1970년대 중 2때 TV에서 박스컵 국제축구대회를 중계했었는데 그 때 맹광섭 선생님(작고)께서 심판을 보셨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비가 엄청나게 오는 가운데 경기가 펼쳐졌다. 선수들은 진흙탕 속에서 백넘버가 안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심판을 보는 맹광섭 선생님은 상당히 스마트하셨고 포마드를 발라서 머리를 넘기신 모습이 참 단정하시고 근엄해 보이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런 심판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됐는데 과정을 설명해달라.

사실 하나의 희망이었을 뿐 내가 심판이 될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심판이 되려면 축구 선수생활을 해야 하는데 고교 입학할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살고 있던 대구에는 축구팀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국제심판으로 유명하신 이우현 선생님을 찾아가 많은 상담을 했다.

포기하지 않고 꿈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1987년 생활체육심판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대한축구협회 정식 심판은 꿈을 꿀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체육심판이라도 되어서 어렸을 적 꿈을 조금이라도 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220명 정도가 시험을 봤는데 1등을 차지했다.  이우현 선생님이 보시고는 축구협회 공식경기에 데뷔시켜도 괜찮겠다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당시만해도 심판 인력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라 축구협회에서는 축구 선수 생활을 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자질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심판의 수도 증가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해 12월에 축구협회에서 심판 특별 1기생을 모집했고 운 좋게도 발탁되어 심판교육에 참가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일반인들도 심판 교육에 참가하고 심판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 일반인 출신 심판들이 선수 출신 심판에 비해 경기를 읽는 눈이나 감각 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 유럽에는 심판 대부분이 선수 출신이 아니다. 물론 선수 출신에 비해 경기를 읽는 눈이나 감각이 떨어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충분히 극복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경기비디오를 많이 보며 직접 경기장도 찾아 다른 심판들의 경기진행을 많이 연구한다. 사실 그것 때문에 직장을 소흘히 해 많은 불이익도 받았다.(웃음)

남들이 하는 경기에서 발생하는 실수를 그냥 쉽게 넘기면 자신에게 그런 상황이 닥쳐도 쉽게 대처하지 못한다. 남의 실수를 나의 교재로 삼는 셈이다. 오늘 봐둔 것을 내일 아침 운동장에 나가 그와 같은 상황을 연상하고 나름대로의 대처방법을 준비한다. 내가 신호하고 휘슬을 불고 그 위치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든지 선수들이 항의해올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강경하게 나갈 것인가 웃으며 넘어갈 것인가 이런 모든 상황들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2급 심판 자격증을 받았을 때 동기가 32명이었는데 선수 출신이 아닌 일반인은 나 하나였다. 아마도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가장 감동했던 것이 나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동기 중에는 허정무, 한문배, 김진옥, 이상용 등 국가대표 출신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자격증을 받았다는 것이 일단 영광이었고 저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좋은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3-4배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경기를 읽는 능력이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고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거의 빠짐없이 운동을 해왔다.

- 좋은 심판이 되기 위한 노력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일반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 맥주 한잔하고,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는데 나는 심판생활을 15년 동안 해오면서 이런 것을 제대로 못했다. 당장 내일 아침 운동에 지장이 있을까봐 맥주 한잔 입에 댈 수 없었다.

국제심판이 되고 나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영어의 중요성을 크게 못 느꼈다. 선배 심판들 역시 영어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해 그런 조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축구계에서는 심판들의 영어구사능력을 중요시 여기고 영어를 하지 못하면 큰 게임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 되어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 이후 1년이면 250일 정도는 해외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많이 써야 하는 시점이었고 학원에 나갈 시간이 없어서 집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지금은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관리를 15년 동안 해왔는데 거의 기계와 같은 생활이었다. 일반인들이 보면 과연 저 사람이 인간으로 살았을까라고 할 정도의 타이트한 생활이었다. 그런 모든 것을 이겨내고 해왔다는 것이 내 개인적으로는 참 자랑스런 부분이다.

- 그렇게 절제하고 타이트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내 목표는 한국 최고의 심판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심판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국제무대에서는 그들과 모든 것이 비교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 심판들이 참 잘한다라는 인식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싶었고 우리 후배 심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심판들의 첫 번째 목표는 프로리그 심판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제 심판이 되는 것이고, 마지막이 월드컵에서 심판을 보는 것이다.
특히 국제심판들은 매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시합에서 실수가 발생하면 이것이 모두 집계되고 먼저 AFC(아시아축구연맹)의 심판배정에서 제외된다. 또한 이 기록들이 FIFA에 보고되기 때문에 당연히 다음 시합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시합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완벽한 준비가 필요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집중력, 협조, 상황인식능력 등을 완벽하게 갖춰야 한다.

옛날 선배들은 시합 전에 술 한잔하고 해도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내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에 기계와 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들이 사실 다 스트레스이긴 한데 이것을 견뎌내기 위해 나름대로의 취미생활을 즐긴다. 나 같은 경우 음악감상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푼다. 팝이나 대중가요,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듣는다. 전세계 각국을 나갈 때마다 그 나라의 음악을 들어보며 다양한 문화를 느끼기도 하고.
문화를 이해하면 그 나라 선수들의 심리나 행동을 빨리 파악할수 있다.

- 경기에 들어서기 전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있는가?

항상 내가 주관할 경기의 팀들에 대한 분석을 한다. 그 팀의 전체적인 팀 전술, 패턴, 선수들의 움직임, 개개인의 성향 등을 사전에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월드컵의 경우 32개 본선 진출국의 팀컬러를 대체적으로 분석했었다. 그리고 특히 내가 맡은 경기였던 브라질과 터키에 대해서는 더욱 꼼꼼하게 파악했다.

요즘에는 심판들도 경기전 운동장에서 워밍업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심판들은 워밍업을 하지 않거나 심판실 내 콘크리트에서 하고 그랬었다.
그러다가 다치면 그 경기를 누가 주관하겠는가. 필드에 나가서 필드 사정도 익히고 경기장 분위기도 익힐 겸 센터필드에서 몸을 풀고 있다.

지금은 아시아 모든 심판들도 필드에 나와서 워밍업을 한다. 원래 경기 전 워밍업은 하지 않아도 제재를 받진 않지만 만약 워밍업을 하지 않고 경기장에 들어가면 몸이 풀리기까지 처음 20-25분은 뛰는 것이 매우 힘들다. 몸을 풀고 들어가면 경기 시작하자마자 전력질주를 해도 근육에 무리가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워밍업 없이 들어갔다가 갑자기 전력질주해서 근육에 무리가 오면 큰일이 생긴다. 경기운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일상 생활을 할때도 사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차를 타고 갈 때도 그냥 다니지 않는다. 옆에 차가 휙 지나가면 저 차가 선수였다면 내가 과연 볼 수 있었을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등을 생각한다. 생각 자체가 기계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무리 컨디션이 좋고 상황이 좋아도 모든 사고는 0.01초에 일어난다. 그야말로 탁 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이다. 경기장 안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봤는데 나만 수비와 일직선상에 서 있어서 뒤에 있던 선수가 가해하는 것을 못 볼 수도 있다. 내가 골라인 선상에 서 있는데 골키퍼가 앞으로 나온 상황에서 슛한 것이 수비수 손 맞고 나올 수도 있다. 골키퍼에 가려 그 상황을 나만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경기장 안에서 심판은 위치를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좋은 각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 매일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오늘 근육의 컨디션은 어떤가, 오늘 전력질주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전력질주를 조금 줄여서 15번 정도 해야겠다, 그렇다면 어느 타이밍에서 전력질주를 할 것인가 이런 부분들을 준비하는 것이 정신적인 준비이다.
내가 건강에 자신이 없다든지 근육에 문제가 있다든지 하면 결국은 자신감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강경한 경기운영을 할 수 없게 된다.

- 처음 주심으로 나서 경기를 운영했을 때가 기억나는가?

물론이다. 2급 심판 자격증을 받기 전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한 초등학교 경기에서 주심을 본 것이 최초의 경력이다. 첫 시합은 어떻게 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경험이 없었으니까.(웃음) 단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경기 후 선배 심판들이 지적도 해주고 그랬던 것이 기억난다.
데뷔할 때의 기분은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경기를 마침으로 해서 축구협회에 내가 그 경기를 주관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남들보다 좀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경기에 배정되고 싶었고 좀 더 비중 있는 경기에 배정되고 싶었던 것이 욕심이었다.

- 1992년 국제심판 자격을 얻게 됐을 때의 상황을 말해달라.

1991년 9월에 92년 국제심판 자격시험을 쳤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험을 치게 되어 선배들의 만류도 있었다. 1차 시험 당시 축구협회에서는 3명만 후보에 올렸었다. 그런데 FIFA에서 더 많이 올려달라고 요청해서 그 때 추가로 나도 시험을 쳤다. 1992년부터 FIFA 지침에 의해 주·부심이 나눠져서 시험을 치르게 됐고 나는 그 해에 국제 부심이 되었다.

그러나 부심에 배정된 첫 해인 1992년에는 1경기도 치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축구선배에게 사채까지 내서 3억원 가량을 빌려드렸는데 선배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단칸방에서 힘든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국제 주심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그 당시 공교롭게 국제 부심 자격이 있는 심판이 국제 주심 시험을 보기 위해선 1년을 쉬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마침 나는 위에서 말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잘 쉬었던 케이스다.(웃음)

- 국제 심판이 된 이후 처음으로 주심을 맡은 경기를 기억하는가?

물론이다. 1994년 5월 일본 시즈오카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 1차예선 경기였다. 당시 경기감독관이 싱가폴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을 했다.
"미스터 김이 처음 10분 뛰는 것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 예전에 북한에 당신과 똑같은 심판이 있었다. 처음 10분을 뛰는데 번개같이 뛰어 다녔다. 그런데 10분이 지난 뒤에는 걸어다녔다. 난 당신에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까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90분간 그런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결국 다른 심판들보다 1경기를 더 배정 받았던 기억이 난다.

- 이후의 국제심판으로서의 활동을 말해달라.

당시 국내에서 기라성같은 국제심판들이 은퇴하면서 축구협회에서 그 뒤를 이을 심판들을 키워내는 시기였다. 김광택씨, 안봉기씨가 선두주자였고 그 이후가 나였다.

1996년 아시안컵이 사실상의 첫 국제대회였는데 그 당시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뛰었던 명망있는 심판들이 많이 와 있었다.  심판들 중에는 내 경력이 가장 일천했다. 내가 맡은 첫 번째 시합이 시리아-중국전이었는데 경기 끝나고 심판들이 모여 분석할 때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러나 두 번째 시합인 이라크-태국전을 치르고 분석할 때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당시 파록 부조 AFC 심판위원장이 "미스터 김은 남들이 10년 동안 배우고 연습해야할 것을 하루만에 해냈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다음에 이란-쿠웨이트간의 3-4위전을 맡았고 그것을 계기로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시합에서 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초청받아서 간 적도 있고 AFC나 FIFA에서 배정을 받아 간 적도 많다. 심판으로서 여한이 없을 만큼 모든 경험을 했다. 올림픽 예선 플레이오프,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 컨페더레이션스컵, 이번 월드컵까지...

그리고 중국 FA컵에도 여러 번 갔다왔고 J리그도 1998년 3개월, 2001년 1개월 동안 나가서 심판을 봤었다. 중국에서는 많이들 알아보고 사인해달라는 팬들도 많다. 외화수입에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웃음)
항상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고 많이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내 인상이 강해 보인다고 한다.(웃음) 그런 면에서 좀 마이너스로 작용되는 부분도 있지만 경기장에서는 엄해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항상 화내는 심판이 가끔가다 웃으면 선수들은 엄청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항의할 것도 하지 않게 된다.(웃음)

- 한국 심판으로선 최초로 주심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는데.

어떤 경기든지 똑같다. 초등학교 경기든 월드컵이든 세기와 시간이 틀릴 뿐 경기내용이나 파울 상황은 똑같다. 경기장 들어갈 때 항상 평온한 마음을 갖고 들어가면 아무리 큰 경기라도 편안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 오히려 월드컵 본선보다도 미국-멕시코전 같은 역사적이고 특별한 경기가 심리적으로는 더 부담된다.

사실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주심 배정을 목표로 준비했었다. 그 때 아시아 심판랭킹에서도 3위였고 후보로 선발됐었는데 마지막에 사우디 심판으로 바뀌었다. 바뀐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 때가 체력적으로도 가장 완벽한 상태였고 아시아 심판계에서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997년, 98년에는 내 경기테이프를 일본 축구협회에서 심판 교재로 썼을 정도였다.

- 브라질-터키전에서 사상 첫 월드컵 주심으로 경기를 뛰었는데 당시 판정에 논란이 많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끝나고 나서 심판감독관은 칭찬을 해줬다. 당시 브라질의 페널티킥을 설명하자면 사실 나는 터키 선수가 브라질 선수를 잡은 그 상황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인지 밖인지 정확히 볼 수 없는 위치였고 부심이 보고 있었다.
이미 경기 전에 약속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 파울이 밖에서 일어나면 부심은 그 자리에 서있고 페널티킥 위치이면 코너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내가 가면서 보니까 부심은 코너로 달려가고 있었다. 페널티킥을 확신했고 완벽한 찬스에서 뒤에서 잡았으니 퇴장을 주고 바로 페널티킥을 줬다.

비디오를 보고 페널티킥이나 아니냐로 논쟁되면서 영국 BBC 방송에서도 페널티킥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브라질에서도 말이 많았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해 BBC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까지 생각했다.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터키 선수가 잡은 것은 맞지만 잡은 상태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안까지 넘어간 뒤에 놓았기 때문에 페널티킥이 맞다.
잡은 시점이 아니라 놓은 시점을 보는 것이다. 어드밴티지 룰에 따라 공격자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상대가 파울해도 볼이 살아나가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고, 재차 파울이 들어오면 어드밴티지를 주고 안주고를 결정한다.
그 팀의 어드밴티지는 무엇인가? 명백한 득점기회였고 단독찬스였다. 명백한 퇴장이고 놓는 시점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이었으니 페널티킥이 맞다.

또한 터키의 하칸 운살이 히바우두에게 공을 찼을 때의 상황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시 히바우두에게 공을 찼던 하칸 운살의 행동은 경고를 주기 충분했고 그는 이미 전반에 경고 1회를 받고 있던 상황이라 경고를 주고 경고 2회로 퇴장을 시켰다.

히바우두가 공에 맞았을 때 얼굴을 감싸쥐고 오버액션을 취했을 때 왜 경고를 주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지금 다시 똑같은 상황을 맞이해도 나는 경고를 주지 않을 것이다.
심판의 입장에서는 히바우두의 행동에 대해 처벌할 수 없다. 히바우두는 그 상황에서 분명 볼을 맞았고 피해자였다. 엄살을 떨든 말든 일단 공에 맞은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헐리우드 액션과는 다른 것이다. 공에 맞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FIFA 기술위원회에서 히바우두에게 벌금을 판정한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경기 규칙상 히바우두의 행동을 처벌할 수는 없다.

FIFA 기술위원회에서 한국에 배정된 36명의 심판을 대상으로 질의해본 결과 역시 페널티킥이나 히바우두 문제에 대해 내 판정이 옳았다고 인정했다. 지금도 분명 나는 떳떳하다.

2편에서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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