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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근, "화려한 선수보다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될 것"

연세대 3학년에 재학중인 신동근/MUKTA

2002년 3월 7일 기사...


 2001년 10월에 있었던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 상비군과의 연습경기는 히딩크 감독에게 한국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신예들을 발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연습경기에서 올림픽대표 상비군의 몇몇 선수들은 국가대표 선배들에게 뒤지지 않는 좋은 기량을 선보였고 이는 곧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었다. 이번에 소개할 신동근(21, 연세대) 역시 이 기회를 통해 국가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당시 젊은 신예를 찾고있던 히딩크 감독은 결국 현영민, 차두리, 최성국, 김정우 등과 함께 신동근을 국가대표팀 대구훈련에 합류시켰고 이 중 현영민, 차두리, 그리고 신동근은 11월에 열린 세 차례 A매치에 출전할 대표팀 명단에까지 합류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180cm, 70kg의 체격조건을 갖춘 신동근은 오른쪽 윙백과 측면 미드필더 및 중앙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으며 특히 측면에서의 움직임이 돋보이는 선수이다. 연세대 김준현 감독은 신동근에 대해 "축구를 이해하는 머리, 개인기, 스피드 등 모든 것을 갖춘 선수이다. 다만 파워와 근성에서 다소 부족한 면이 아쉽다. 이 점만 고쳐나가면 더욱 좋은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평했다.

 올해 연세대 3학년에 올라가는 신동근은 99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U-20 세계청소년선수권에 출전하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 79년생이 주축을 이루던 청소년대표팀에서 유일하게 81년생인 신동근이 뽑혔다는 것만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는 대목. 당시 청소년대표팀에는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 김경일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현재 주가급상승 중인 송종국 또한 주전멤버로 활약하고 있었다.

 "동국이형이나 은중이형을 비롯해 모두 유명한 형들이어서 처음엔 약간 주눅도 들었어요. 더군다나 외국팀을 상대로 경기를 갖는 것도 처음이었구요. 예선 마지막 경기인 말리전에서 90분간 뛰었는데 그 전에 조영증 감독님께서 오셔서 말리전에 뛸 자신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전 자신있다고 대답했고 경기에 뛰었죠. 전반 끝나고 조영증 감독님께서 기용하길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더군요.(웃음) 이 대회를 경험하고 보니까 실력차이는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경험부족에서 오는 체력안배 및 경기템포 조절 실패 같은 부분들이 16강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신동근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때는 서울 숭신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 윙백을 오가며 다재다능한 능력을 뽐냈다. 미드필더로 처음 축구를 시작해 재현중 3학년때부터 스트라이커로, 청구고 2학년때부터는 미드필더와 윙백으로 전천후로 활약했던 것. 그리고 한참 정서적으로 예민할 시기인 이 무렵 신동근은 큰 시련을 두 차례 겪게 된다.

 첫 번째는 재현중 3학년 시절이었다. 지금은 8강제도로 다소 완화됐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4강에 들어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재현중은 그 해에 4강에 진입한 적이 없었다. 재현중은 서울시장기 8강에 올랐고 이제 한 고비만 넘기면 되는 상황. 그러나 8강전을 앞두고 폐암 말기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신동근은 큰 심적 고통을 받게 됐다.

 "집에서 저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가 단순한 위가 안좋으신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대회 도중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어도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인 줄 몰랐죠. 그런데 8강전을 앞두고 새벽에 아버지 친구분이 숙소에 오셨더라구요. 그 분과 같이 병원에 갔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 상황에서 경기를 뛴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팀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죠. 그 대회에서 4강에 오르지 못하면 3학년 애들은 진학을 못했거든요. 제 고통만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죠."

 결국 재현중은 결승까지 진출했고 신동근은 삼일장에 참석 못한 채 결승전을 치렀다. 결승전에서 동대부중을 만난 신동근은 선취골을 올리며 기선을 제압했으나 3골을 내리 내줘 1-3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주위에서 말들도 많았어요. 아버지 삼일장을 참석하지 않고 경기 뛰러갔다고 말이죠. 그렇지만 우승컵을 눈앞에 두고 팀의 핵심인 제가 빠진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어요. 팀동료들과 감독님도 우승컵을 안고 삼우제때 다 함께 찾아뵙자고 말씀하셨구요. 선제골을 올리는 순간까지만 해도 꿈이 이뤄지나 싶었는데 3골을 허용해버렸어요.(웃음) 그런데 7분을 남기고 우리가 연속 3골을 뽑아내 4-3으로 역전승을 거뒀죠. 저 자신도 믿기지가 않아서 이건 아버지가 도와주신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아버지 삼우제때 팀원 모두가 우승컵을 안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뵈었죠."

 그러나 큰 아픔을 겪었던 신동근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또 한번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재현고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전학가야 할 상황이 놓인 것.

 "당시 재현고 감독님은 축구를 모르는 분이셨어요. 코치 선생님 때문에 재현고에 갔었는데 코치 선생님이 그만두시게 됐거든요. 그러고 나니 애들이 하나둘씩 떠나더라구요. 축구를 그만두는 애들도 있었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애들도 있었어요. 결국 저 역시 축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팀으로 옮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당초 서울에 있는 학교로의 전학을 생각했던 신동근에게 당시 청구고 감독이었던 박경훈씨(현 부산 아이콘스 코치)가 찾아왔다. 결국 박경훈 감독의 설득에 신동근은 짐을 꾸리고 대구로 내려가게 된다.

 "처음엔 당연히 집과 가까운 서울 학교로 가려고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청구고의 박경훈 감독님과 박창현 코치선생님이 오셔서 적극적으로 붙잡으시더라구요. 당시 청구고가 용인으로 합숙훈련을 왔었는데 우리 팀에 안와도 좋으니 며칠간만이라도 같이 연습하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같이 연습했는데 청구고가 대구 내려가면서 저도 같이 데리고 가더라구요.(웃음) 결국 청구고로 가게된거죠.(웃음) 박경훈 감독님이야 국가대표와 프로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셨던 분이시고 박창현 코치님 역시 프로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분이라 이 분들 밑에서는 배울 게 많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청구고로 팀을 옮긴 뒤 신동근은 원래 포지션인 미드필더로 돌아와 팀의 핵심선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3학년 들어 청구고는 전국대회에 3번이나 결승에 오르며 고교강자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구축했다.

 다만 신동근으로서 아쉬운 것은 3번의 결승에서 모두 패하고 만 것. 홈그라운드에서 펼쳐진 대구 MBC배 준우승에 이어 전국선수권과 전국체전에서 연달아 준우승에 그쳤다. 특히 부평고와 맞붙은 전국체전에서는 1-5로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 부평고는 고교최강이었어요. (이)천수와 (최)태욱이, (박)용호, (김)정우, (박)병규까지...대단했죠.(웃음) 전반에는 1-1로 비긴 채로 끝났는데 후반 들어 내리 골을 내주며 1-5로 졌어요.(웃음)"

 그리고 이 해 고등학생으로는 유일하게 99 U-20 세계청소년선수권에 참가했던 신동근은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다음 해인 2000년 2월 일본에서 열렸던 신년 4개국 청소년 초청대회에 U-19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 오른쪽 윙백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파라과이, 이탈리아를 꺾고 우승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 한국 U-19 대표팀의 경기력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축구팬들은 2000년 11월 이란에서 열린 제 32회 U-19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U-19 대표팀은 첫 경기인 중국전에 패하는 등 고전 끝에 4강진출에 실패, 2001 U-20 세계청소년대회 출전권조차 획득하지 못하는 부진을 보였다. 신동근 자신도 손가락부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쉬움이 크죠. 무엇보다 좋은 찬스가 많이 있었음에도 결국 골이 안터졌다는게 4강 실패의 원인인 것 같아요. 운이 안따라줬다는 생각도 들어요. 천수나 태욱이, (전)재운이 등도 크고 작은 부상으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저 역시도 손가락 부상을 당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었죠. 제가 원했던 만큼의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있습니다."

 U-19 대표팀의 실패로 2000년을 아쉽게 마무리한 신동근이지만 2001년은 그에게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1년 10월 올림픽대표상비군의 일원으로 대구훈련에 참가, 국가대표팀과의 연습경기를 통해 히딩크 감독의 낙점을 받고 국가대표팀에서 훈련하게 된 것.

 "올림픽대표상비군으로 연습게임 할 때에는 뛰어볼 만 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국가대표팀에 들어갔을 때는 모두 대선배들이라 어렵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도 했구요.(웃음) 주로 우리 또래끼리 어울렸죠.(웃음) 훈련이나 전술적인 부분은 올림픽대표상비군으로 많이 적응됐었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올림픽대표상비군 최진한 코치님이 국가대표팀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르치셨거든요."

 "가장 많이 배운 부분은 선배들의 프로의식이었어요. 아마추어인 저와 다르게 자신의 몸관리나 프로의식이 철저했어요. 몸이 곧 재산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그리고 히딩크 감독님께서는 항상 강한 투쟁심과 적극적인 플레이를 주문하셨어요. 제가 부족하다고 여기던 부분들이기 때문에 고치려고 많이 노력했죠."

 이후 신동근은 11월의 세 차례 A매치와 골드컵 예비명단, 우루과이전 명단에 뽑히며 국가대표팀을 들락거렸으나 아직 출장기회를 잡진 못했다. 신동근 본인은 이에 대해 "아직 아마추어이다보니 감독님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고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죠. 적극적인 플레이가 아직 부족하기도 하구요. 그래도 국가대표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사실 히딩크 감독이 신동근을 비롯해 검증되지 않은 어린 선수들을 국가대표팀에 기용하는 것에 대해 논란도 많다. 개인적으론 이 점에 대해 다소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이 나이 또래의 어린 선수들에게 있어서 국가대표팀에서의 경험은 자신의 기량발전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된다. 물론 2002월드컵이 최우선 과제이고 최우선 목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2002월드컵 끝나고 축구를 그만둘 것이 아니지 않는가.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경험이 부족한 점 이외에는 실력면에서도 그렇게 뒤지지 않는다고 보는 선수들이다.

 현재 모든 포커스가 월드컵에 맞춰있다보니 신동근 또래의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 올림픽대표상비군이 유명무실화된 상황이다. 결국 이 또래 선수들의 경우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몇몇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들의 국가대표팀에서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이들의 성장에 한국축구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신동근 역시도 올해 안에 프로무대에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프로팀에서도 작년부터 제의가 들어온 상태이며 국내 프로구단들 역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어깨부상을 당했는데 일단 이것부터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연고전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구요.(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빨리 프로무대로 진출하고 싶습니다. 예전 제가 중학교 때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선수들 부상당했을 때 나르는 들 것을 든 적이 있어요. 그 때 홍명보 선배를 직접 봤거든요. 경기장 전체를 지배하는 홍명보 선배의 카리스마에 반했었던 기억이 있어요. 저도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화려한 것보다 어느 팀을 가더라도 그 팀에서 인정받는, 꼭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축구계에 신동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확실히 남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신동근은 그의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한 열성팬께서 U-19 대표팀 시절 제 플레이를 보고 다음카페에 팬클럽을 만들어주셨어요. 지속적으로 저에게 성원을 보내주시는 팬들을 보면 힘이 솟아요. 저 역시 가끔 들어가보곤 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남기기도 어색해서 글은 자주 못 올리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 속으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해 한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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