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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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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최문식, “90년대를 수놓았던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


2004년 1월 13일 KFA 홈페이지 기사..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한 첫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오르며 성공적인 출발을 보인 최문식은 그야말로 포철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로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최문식이 확실히 팀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당시 포철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멤버를 자랑했고, 그 틈에서 신출내기 최문식이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최문식은 한동안 2군에서 경기를 뛰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단 입단 초기에는 미드필더에 이흥실, 김상호 선배님 등이 계셨고, 공격진에도 조긍연, 최상국, 이기근 선배님 등 쟁쟁했죠. 모두 리그 득점왕 출신들 아닙니까.(웃음) 그때만 해도 공격진이 워낙 기라성 같으니까 제가 그 자리를 꿰찬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첫해에 신인왕 후보에도 오르고 그랬지만, 제가 생각해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구단이나 감독님이나 경험을 쌓기 위해 2군경기에 나갈 것을 요구하셨죠. 솔직히 1군에서 뛰다가 2군에서 뛴다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 때가 제 개인적으로는 어려웠던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 생각했던 것이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대학에 온 것 아닌가. 내 친구들도 모두 대학에서 뛰고 있고...걔들은 몇년 있어야 프로에 입단할텐데 뭐가 그리 급한가. 대학에서 뛰고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꾹 참고 내 운동을 충실히 하자”라는 것이었어요. 결국 92년부터는 완전히 내 자리를 찾고, 팀 우승도 이끌고 그랬죠.“

그렇지만 이후에도 최문식을 지도했던 감독들 대부분은 그의 감각을 인정하면서도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최문식의 선수생활 내내 그의 뒤를 따라 다니는 딜레마였다.

“90분 풀타임으로 뛴 경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야 물론 있었어요. 경기를 뛰다가 나오게 되거나 교체로 투입되면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도 있긴 있었죠. 물론 제 몸컨디션을 고려해서 배려해주셨던 것이기도 하지만...”

“첫해 같은 경우 제가 풀타임으로 뛸만한 능력이 아니었어요. 이후 기회가 차차 주어지다보니까 실력도 조금씩 늘고, 골도 기록하고, 출장횟수도 늘고, 시간도 늘었죠. 이렇게 차근차근 쌓인 것이 풀타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는 풀타임은 아니더라도 제 나름대로의 영역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체력을 위주로 경기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팀에서는 90분을 기용하는 것보다 70분 정도를 소화하는 것을 원했어요. 팀을 안정권에 만들어놓고 교체되어 나가거나 후반에 조커로 투입되거나...개인적으로는 젊은 시절은 물론 최근까지도 연장전까지 뛸 수 있는 체력이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감독이 어떤 생각이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 것이죠. 그래도 나름대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90년대 포항의 황금기를 함께 하다.

사실 최문식이 포철에 입단할 무렵은 팀에 있어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시점이었다.

80년대 우승 2번, 준우승 2번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던 멤버들이 하나둘 은퇴한 가운데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이흥실-최상국-박경훈-남기영 등도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그 뒤를 이어 김상호, 이기근, 조긍연, 유동관, 윤성효, 이영상 등이 포항의 주축 선수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3인방’ 홍명보, 라데(이상 92년 입단), 황선홍(93년 입단)과 ‘영원한 포항맨’ 박태하(91년 입단)까지 포항에 합류했다. 바야흐로 80년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호화군단’ 포항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다.

최문식 역시 쟁쟁한 동료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과의 호흡을 통해 축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최문식에게는 소중한 추억.
그리고 포항은 92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93시즌 아디다스컵 우승을 잇달아 거머쥐기에 이르렀다.

최문식의 활약도 빼어나 92시즌에는 총 31게임에 출장해 6골, 2도움을 기록했으며, 93시즌 아디다스컵에서는 3골로 공동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93시즌 아디다스컵에서는 우승을 결정짓는 일화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5-3 승리에 막대한 기여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말 대단했죠. 대략 95-96년 정도까지만 해도 포항의 전력이 그 어느 팀보다 강했고, 다른 팀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팀이었어요. 물론 우승은 92년 정규리그와 93 아디다스컵 우승 등 2번에 그쳤지만 팀 전력의 막강함은 단연 뛰어났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홍명보 선배로부터 시작해서 윤성효, 유동관, 김상호 선배, 거기에 저도 있었고(웃음), 전방에 황선홍 선배와 라데까지...정말 기라성같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제가 미드필드에서 찔러주면 황선홍 선배나 라데가 받아서 골 넣어주고.....그 당시를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했다는 기억뿐입니다.”

“특히 라데는 제가 상무에 입대한 뒤에도 저를 찾고 그랬다네요. 제가 없으니까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찔러주는 패스가 라데의 입맛에 잘 맞았었나봐요.(웃음)  사실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죠. 제가 볼을 잡으면 선홍이 형이나 라데가 적절하게 움직여주고, 제가 거기로 찔러주고...서로 플레이하기도 쉽고, 그러다보니 골찬스도 많이 나면서, 득점도 많이 하고 그런거죠.”

“아, 한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라데 그 친구가 대단한 개구쟁이였다는 거죠. 서로 경기장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서로 어울려서 장난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라데가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요.”

92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과 크라머 감독

프로무대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최문식이었지만, 대표팀에서는 번번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 첫번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출범 초기 권태규(당시 유공)와 함께 유이한 프로선수였던 최문식은 신태용(당시 영남대), 김병수, 노정윤(이상 당시 고려대) 등과의 미드필더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결국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과 본선 모두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92년초에 열렸던 올림픽 아시아예선이야 91년 시즌 최문식이 프로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던 때인 만큼 그렇다 치더라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의 경우 아쉬움이 남은 것은 사실. 92년 시즌 우승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할 정도로 그해 포항에서의 활약이 컸기 때문이다.

“눈물이 났죠. 올림픽에서 뛰고 싶다는 마음이야 저도 굴뚝같았지만, 제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제외된 거 아니겠습니까. 실력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은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인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의 부임으로 인해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크라머 감독은 당시 한국축구계의 일반적인 코칭법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코칭법으로 선수들을 대했다.

기본적으로 훈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다양한 훈련법으로 선수들이 즐겁게 훈련에 임하게 만들었다. 훈련스케줄 역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선수들에게 미리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코칭법이 너무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던 탓일까. 선수들은 이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이것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크라머 감독은 아쉬움을 남긴 채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한국 선수들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강한 훈련을 많이 받아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크라머 감독님의 부드러운, 그리고 훈련량이 많이 줄어든 코칭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쉽게 말해 정신적으로 나태해진 감이 있었죠.”

“그때까지 우리는 기본기 훈련을 조금 하다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러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껏 그렇게 볼을 차왔는데, 크라머 감독님께서 기초부터 하고 기본적인 훈련만 하니까 ‘이거 어렸을 때 다 배웠던 것들인데 왜 또 하나’라는 생각들을 했죠. 그리고 그 당시에는 솔직히 ‘저 분은 외국에서 오셔서 도대체 뭘 가르치시는건가?’라는 생각도 하곤 했어요.(웃음)”

“당시 선수들의 인식도 지금과는 약간 달랐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을 다 알고 있는 지도자가 맡으면 좋은데, 외국인 지도자들이 오면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해야 하니까 선수들로서는 그런 점이 조금 답답했죠. 물론 지금이야 우리가 자라왔던 당시의 축구와는 많이 달라졌고, 이해의 폭도 훨씬 넓어졌기 때문에 외국인 감독이 오더라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대표팀에서의 좌절

92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에서 실패를 맛봤던 최문식은 94 미국 월드컵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에서의 불운을 떨쳐내는 듯 보였다.

최문식은 바레인, 홍콩, 인도, 레바논과 한 조를 이뤘던 월드컵 1차 예선과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지속적으로 주전으로 뛰며 김호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1993년 5월 15일, 레바논에서 열렸던 1차 예선 홍콩전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골은 최문식 자신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열렸던 경기인데 우리가 2-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후반 중반(정확하게 후반 28분)에 제가 볼을 잡아 아크 서클에서부터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골을 넣었었죠. 다시 한번 해보라고 하면 절대 하지 못할 그런 골이었습니다.(웃음) 다른 분들도 한국 축구에서 볼수 없었던 골이라고 평가해주셔서 기분이 좋았죠. 89년 프로 데뷔골, 역시 89년 일화전에서 오버헤드킥 골과 함께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입니다.”

“94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은 정말 극적이었죠.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바로 최종예선 마지막 북한전이었어요.  저도 출전했는데 3-0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벤치를 보니까 모두 우울한 표정이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북한에 이기더라도 같은 시각에 경기를 펼치고 있는 일본이 이라크를 이기면 본선진출에 실패하는 것이었거든요. 경기가 끝나고 북한 선수들과 악수하고 나오면서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하면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벤치에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난거에요. 우리는 나오면서 ‘왜들 그래?’라고 어리둥절하다가 눈치채고 같이 광분했죠.(웃음) 일본이 이라크에게 2-1로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 동점골을 내줬더군요.”

그러나 최문식은 이와 같은 예선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막상 94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하는 불운을 또다시 맛봤다.

김호 감독은 1무 1패를 기록한 뒤 맞붙었던 독일과의 마지막 3차전을 앞두고 조진호와 최문식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조진호의 투입을 결정했다. 최문식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뭐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이 그 정도였던 것이고, 저보다 좋은 동료들이 있었던 거죠. 물론 기회만 주어진다면 나가서 제 실력을 보이고 싶었고, 우리가 승리하는데 기여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어요.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가서 보고 배운 것이 많았기 때문에 큰 후회는 없습니다.”

“마지막 독일전을 앞두고 경기 전날 밤까지도 저와 진호를 놓고 코칭스태프에서 많은 고심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제 나름대로 기회가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결국 진호에게 기회가 주어졌죠. 당시 미국이 워낙 폭염이였던 관계로 체력적으로 더 많이 소화할 수 있는 진호가 낙점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내가 뛰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상상을 가끔 해보곤 해요.”

-> 3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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