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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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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최문식, “90년대를 수놓았던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


2004년 1월 12일 KFA 홈페이지 기사...

1990년대 K리그를 통해 각광받았던 선수 중 한명으로 최문식(33)을 꼽을 수 있다.

최문식은 축구공을 이용한 온갖 현란한 기술을 실전에서 보여줬고, 예측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플레이로 축구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그 어떤 선수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로 인해 별명과 팬클럽 이름 모두 ‘테크니션’이었다.

김진국, 이영무(이상 70년대), 이태호(80년대), 김병수(90년대초) 등의 뒤를 이어 한국 테크니션의 대명사로 불리웠으며, 이후 등장하는 윤정환, 고종수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문식은 1989년 동대부고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프로팀 포항제철(현 포항)에 뛰어들어 2002년 부천에서 활동할때까지 총 265게임에 출장, 47골-25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한명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축구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화려한 플레이가 그의 존재를 더욱 각인시켰다.

그러나 최문식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잦은 이적(전남->오이타->수원->부천)으로 인해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2002시즌이 끝난 뒤에는 미국 MLS의 댈러스 번 진출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계속됐던 불운은 여기에서도 그의 앞을 막았다. 정식계약에 합의하고 댈러스에 합류했으나 여러 가지 내부문제로 인해 결국 마지막에 무산되고 말았던 것.

그리고 한동안 아무도 소식을 몰랐던 그의 이름이 다시 들려온 것은 2003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12월 21일 홍명보가 주최한 소아암 어린이 돕기 자선경기명단에 최문식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8월에 열렸던 K리그 OB올스타전에도 불참했기에 그의 이름은 더욱 반가웠다.

자선경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최문식의 모습은 예전에 비해 체중이 조금 불어 보였으며, 항상 짧았던 머리도 치렁치렁 길러 파마를 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 미국 진출이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궁금했기에, 또한 90년대 눈부신 개인기로 축구팬들을 감탄시켰던 그의 지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미국에 있다가 11월말에 귀국했어요. 귀국한 이후 주위분들에게 인사다니고, 연말 모임에도 나가고, 그냥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웃음) 아직까지 미래에 대해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명보형이 한달 전부터 연락을 했었다고 하더군요.  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야 들어왔기 때문에 연락이 안됐었죠. 귀국한 후에 명보형이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자선경기가 있는데, 너도 같이 하자. 좋은 일이다’라고 이야기했고, 저도 흔쾌히 동의했죠. K리그 OB올스타전은 미국에 있을 때라 연락이 닿지 않아 통보를 못받았어요.”

“오랜만에 경기에 뛰었고, 몸의 변화도 있었지만 예전 동료들과 공을 차는 것이 너무 즐거웠고 재미있었어요. 더군다나 소아암 어린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뜻깊었죠.”

축구팬들이 궁금해하는 댈러스 번 입단과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도 최문식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말을 아끼는 모습.

다만 일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고, 이로 인해 최문식 개인으로선 선수생명의 위기까지 불러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직 현역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됐다.

“댈러스 번 입단이 확정된 상황이었죠. 그러다가 내부적인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축구를 하다가 말다가 그런 상황이었어요.”

‘효창의 마라도나’로 불리우던 고교시절

최문식의 고교시절은 아직까지도 본인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시절로 남아있다. 최문식은 동대부고 시절 ‘효창의 마라도나’라 불리우며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로 고교무대를 평정한 바 있다.

특히 동대부고 3학년이었던 1988년 대통령금배에서는 팀 창단 10년만에 첫 우승을 안겼으며, 7골로 대회 득점왕과 MVP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도 제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신감이 넘쳤고, 내 플레이에 만족하며 경기를 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볼을 찼기 때문인지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고, 많은 분들의 관심 속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죠.”

이렇듯 최문식이 또래 선수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꾸준한 기술연마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공차는 것을 좋아했던 최문식은 팀훈련 외에도 개인적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팀 환경에서라면 그런 발재간이나 개인기 훈련을 할 바에야 체력훈련에나 더 신경쓰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을테지만, 최문식에게는 다행히 그런 부분에 대해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펠레나 마라도나 같이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을 흠모했어요. 그래서 저도 그런 쪽으로 개인훈련을 많이 해왔구요. 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하는구나, 저런 기술은 어떻게 하는거지?’ 하고 생각하며 따라해보려고 노력을 했었죠.”

“팀훈련은 충실하게 했고, 그 외의 시간에 개인훈련을 할 때는 볼을 갖고 하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많이 투자했어요. 그렇지만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마라도나의 단단한 체격을 보면서 웨이트를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틈틈이 했죠.”

“지도자분들도 그런 부분에 대해 특별한 주문을 하시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오랜 기간 제 나름대로 기술을 연마해왔기 때문에 고3때 그렇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틈만 나면 공 갖고 나가서 찼고, 잘 때도 천정에 축구공이 보이고 했으니까요.(웃음)”

“탁구공이나 테니스공으로 볼을 찼다는 소문도 퍼졌는데, 그냥 길 가다가 조그만 공이 보이면 발로 차보고, 그랬던 거죠. 펠레나 마라도나도 어렸을 때 신문지 말아서 차고 그랬다니까 저도 볼이 보이면 그냥 차보고 했던 거예요. 포항에 있을 때는 몰래 나가서 정규공보다 작은 사인볼로 연습하기도 했죠. 나름대로 감각을 익히기 위해 괜찮다고 생각해서..(웃음)”

어쨌든 동대부고를 고교정상으로 끌어올린 최문식은 곧바로 U-19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고, 그 해(1988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에도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U-19 대표팀은 일본을 3-1로 꺾고 기분좋은 출발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 0-1패에 이어 UAE에게 0-0으로 비기며 결국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멤버가 괜찮았어요. 서정원, 김병수, 노정윤, 김도훈, 신태용 같은 선수들이 있었거든요. 지나간 이야기지만 만약 그 때 세계 청소년대회 티켓을 획득하고, 더 넓은 무대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과는 뭔가 다른 상황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죠.”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뛰어들다.

지금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당시만 해도 고교 졸업후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류 선수들은 축구 명문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하는 것이 정식코스.

사실 최문식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가지 이유가 그에게 프로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바로 동대부고가 동국대와 같은 재단이라는 것과 포항제철의 이회택 감독이 적극적인 구애를 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당시 몇몇 명문대에서 입학제의가 들어왔었죠. 그렇지만 저는 동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동국대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 말들이 참 많았죠. 내가 동국대에 진학하지 않으면 여러 주위분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었고...”

“그런데 당시 학생신분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실업으로 간다고 하면 아무도 관여를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어요. 여기에 마침 프로팀인 포항제철이 저를 스카웃하기위해 접근했었죠. 당시 포항제철 감독이셨던 이회택 감독님이 제 플레이에 반하셔서 워낙 적극적으로 입단을 권유했어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최문식은 1989년 봄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포철행을 선택했다. 고교생이 프로에 직행해 성공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최문식으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최문식과 이장욱(통진종고 졸, 럭키금성 입단) 등 3명이 그 해에 프로 직행을 택했고, 결국 성공적인 프로생활을 보낸 선수는 최문식밖에 없었다.

고졸 스타의 첫 번째 성공사례로 기록된 최문식은 이후 프로직행을 노리는 고졸 선수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했고, 90년대 중후반부터 고졸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프로무대를 노크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프로직행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대학에서 4년 지내는 것도 결국 프로에 가기 위한 과정이고, 만약 대학 가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한번 도전해보자’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어차피 대학이란 하나의 과정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에 도달한 것이니 지금 당장에 연연하기 보다 멀리 내다보고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죠.”

“그 해에 저를 포함해 3명이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행을 택했어요.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저같은 경우는 그래도 신인왕 후보까지 올라가는 선전을 했죠. 이후에도 나름대로 좋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줬고..”

“제가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에요. 나로 인해 ‘고교생이 곧바로 프로에 가더라도 괜찮구나’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이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만약 그 때 제가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이런 고졸스타의 계보가 좀 더 늦춰졌을 수도 있었다는 그런 자부심이 있죠.”

신인왕에 도전하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최문식이 포철에 합류하자 이내 모든 선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흥실, 최상국, 박경훈 등 당시 한국축구를 주름잡았던 아저씨들 속에서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꼬마가 들어온 셈이니 말이다.

“포철에 입단하고 숙소에 갔는데, 아저씨같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거에요.(웃음) 덩치도 남산만 하고... 아직 얼굴에 여드름이 그대로인 어린애가 들어오니 모두들 귀여해주셨죠. 첫 전지훈련을 대구로 갔는데, 당시 룸메이트는 이길용 선배님(지난해 작고)이셨어요. 그 뒤에 윤성효 선배님, 남기영 선배님 등과 한방을 썼죠. 제가 어리다보니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막상 프로무대에 뛰어든 최문식은 한동안 리그적응에 애를 먹어야 했다. 일단 경기템포부터 고교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안이한 마음으로는 절대 헤쳐나갈 수 없는 생존경쟁의 무대였던 것.

더군다나 최문식의 주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80년대 한국프로축구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였던 이흥실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결국 최문식은 공격형 미드필더 뿐 아니라 좌우 측면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 등 여러 위치에서 전천후로 뛰어야만 했다.

“고교 졸업하고 처음 프로에 뛰어들때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경기를 하면 할수록 부딪치는 것이 있더군요. 힘들다는 것을 처음 느꼈죠.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었던 것과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구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아무래도 공격형 미드필더에는 이흥실 선배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쪽으로 많이 기용되었죠. 그리고 측면 미드필더도 보고...주로 이흥실 선배가 저보다 약간 처져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 이흥실 선배님은 벌써 하늘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같이 공을 찬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시절이었죠.”

다행히 최문식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특유의 감각을 앞세워 리그 적응에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1989년 시즌 17경기에 출장에 6골, 1도움으로 고정운(당시 일화), 차상해(당시 럭키금성) 등과 함께 신인왕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신인왕은 고정운(31경기 출장 4골, 8도움)에게 돌아갔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6-7명 정도가 신인왕 후보로 거론됐었는데, 시즌 막판에는 저와 고정운 선배, 차상해 선배로 압축됐었습니다. 3명이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지만, 고정운 선배가 출장 횟수도 많았고, 공격포인트에서도 앞섰기 때문에 수상하셨죠. 아쉬움은 있지만 고졸로서 프로 첫 시즌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첫 시즌을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보낸 최문식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포항의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주전자리를 확고히 꿰찰 것으로 전망됐다.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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