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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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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오범석, “머리와 센스, 침착함을 겸비한 차세대 수비수”


범석이..내가 정말 총애하는 선수 중 하나다..^^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2년 U-19 대표팀 시절..당시 범석이는 포철공고에 다니고 있었지..
그 당시만 해도 큰 친분은 아니고 훈련장에서 보는 정도였는데, 2004년 초 포항에 취재갔는데 범석이가 있더라..당시 주로 2군에서 많이 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였고, 그런 상황에서 오랜만에 만나니 서로 반갑고 그랬다..^^

그 이후로 연락도 자주하고, 가끔 만나 위닝도 하고, 그렇게 됐지..^^
어느덧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고, 리그 톱 수준의 수비수로 성장한 것이 너무나 대견스럽다..무엇보다 인간성이 된 녀석이기에 더욱 정이 감~~^^

2005년 1월 13일 인터뷰...


2004년 K리그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은 포항의 전도유망한 수비수 오범석(21세)의 존재를 축구팬들에게 단숨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축구팬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이 최고무대에서 오범석은 최성국-카르로스(이상 울산), 나드손-마르셀(이상 수원) 등 K리그 최정상급 공격수들을 상대로 완벽한 방어를 해냈다. 나이답지 않게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대 공격의 길목을 읽어 미리 차단하는 영리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범석은 이미 2003년 U-20 세계선수권에서 주전 오른쪽 윙백으로 나와 안정적인 활약을 펼쳐 축구팬들의 기대를 모은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소년 레벨에서의 활약이었던 탓일까. 막상 2004 K리그가 시작된 이후 오범석의 이름은 소속팀 포항의 출전 선수명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연스레 오범석에 대한 관심도 거의 사그라들었던 상황.

그러나 어린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삼성 하우젠컵을 시작으로 서서히 1군 경기경험을 쌓기 시작한 오범석은 후기리그에서도 거의 전 경기에 출장하며 팀 내에서 확실하게 입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2004 K리그를 마무리하는 플레이오프/챔피언결정전에서의 인상적인 활약에 이어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까지 승선하며, 2004년 대미와 2005년 새해를 힘차게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2004년 최고의 신데렐라’이자 ‘가장 각광받는 신예 수비수’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오범석의 축구인생을 살펴보도록 하자.

울산 옥동초에서 축구를 시작하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오범석은 축구인 오세권 씨(현 KFA 기술위원, 전 학성고 감독)의 아들이다. 축구인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던 오범석은 울산 옥동초 5학년 시절 축구부가 새롭게 창단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버지가 축구선수 출신이셔서 그런지 운동에 소질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볼 좀 찬다는 소리 들었죠.(웃음) 원래 경기도에 살다가 아버지가 축구일 때문에 울산으로 가시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울산 옥동초로 전학을 갔어요. 그리고 5학년 겨울에 축구부가 창단되면서 테스트를 받고 축구를 시작했죠.”

오범석이 처음 축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 오세권 씨는 큰 반대를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까지의 축구는 그저 재미로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렇듯 순조롭게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오범석은 곧바로 팀의 에이스를 꿰찼다. 팀 주장과 등번호 10번이 그의 몫.

“초등학교 때는 공 좀 찬다고 하면 다 그렇게 하잖아요.(웃음) 여기에 공격형 미드필더까지...제가 그랬어요.”

옥동초는 비록 신생팀의 한계 속에 전국대회 진출은 못했지만 경상도에서는 정상급 팀으로 올라섰고, 오범석은 이 무렵부터 현재까지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백지훈(당시 진주 봉래초), 김진규(당시 영덕 강구초)와도 경기에서 자주 맞붙으며 기량을 쌓아나갔다.

“당시 경남지역에서는 진주 봉래초가 세 손가락 안에 들었고, 그 중에서 지훈이가 엄청나게 잘한다고 소문이 났었요. 실제로 저희 학교와 경기할 때도 대단했죠. 그래도 승부에서는 저희 학교가 더 많이 이겼던 것 같은데.."

"그리고 진규와도 몇 번 붙었는데, 당시에도 진규는 여전히 투박했죠.(웃음) 아, 얘네들이랑 정말 친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까 오해하시지는 마세요.”

옥동초를 졸업하고 울산 학성중에 진학한 오범석은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팀의 사정에 따라 스위퍼와 중앙/측면 미드필더를 번갈아 가면서 맡은 것.
무엇보다 재미 차원에서 했던 초등학교 축구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게, 축구에 인생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오범석에게는 큰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중학교에 올라갈 때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구요. 중학교부터는 진짜로 축구하는 거라고..선배들 기합도 있고, 훈련도 심한데 네가 견딜 수 있다면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축구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거라 저도 각오하고 있었어요.”

포철공고 진학, 그리고 브라질 축구유학

울산 학성중을 졸업한 오범석의 진로는 애매했다. 일반적으로 학성중 선수들은 학성고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 오범석의 중학교 동기들 역시 대부분 학성고로 진학했다. 그러나 오범석은 학성고로 진학할 뜻이 없었다. 바로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학성고 감독으로 계셨어요. 사실 친구들도 전부 학성고로 가니까 저 역시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 밑으로 가게 되면 주위에서 말도 많을 것 같고 부담스러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다른 학교로 갈 생각을 갖고 있었고, 결국 포철공고에 입학하게 됐죠.”

오범석이 포철공고를 선택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일단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진 것도 있었고, 또 한가지 브라질 유학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결국 오범석은 포철공고에 입학했고, 1주일 만에 1년 코스의 브라질 유학을 떠나게 된다.

포스코의 후원을 받고 있는 포항과 전남은 매년 연고 고교였던 포철공고, 광양제철고, 청구고, 금호고 등에서 선발된 선수들을 브라질 지코 축구학교로 연수를 보냈다. 오범석이 입학한 해에도 15명의 선수가 브라질 땅을 밟았다.

“그 때 (김)동현이, (황)진성이가 저와 같이 브라질에 갔던 애들이에요. (박)주영이는 우리 바로 다음 해에 갔구요. 처음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들었던 느낌은 너무 덥다는 것 뿐이었죠.(웃음) 낯선 곳이다 보니 ‘내가 1년 동안 여기서 잘할 수 있을까? 내가 한국에 돌아갈 때쯤이면 실력이 많이 늘어있을까? 이러다 인생 그냥 끝나는 것 아닌가?’ 등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요.”

“다행히 환경은 좋았어요. 운동장도, 숙소도 괜찮았고, 밥해주시는 분도 한국분이어서 식사에도 큰 지장이 없었죠. 한가지 더 다행스러웠던 것은 부모님이 시켜서 중1때부터 영어를 계속 배웠거든요. 그런데 브라질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영어를 어느 정도 하실 줄 알아서 적응하는데 좀 더 편했어요. 물론 포르투갈어 통역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부딪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는데, 브라질에 가서야 외국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브라질에서의 1년은 오범석에게 값진 경험이었다. 실력의 향상은 둘째 치고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고,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고교 연령대의 어린 선수에게는 좋은 자극제였던 것.

“브라질에서는 기본기를 정말 중요시해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꼭 기본기 훈련을 먼저 하고 시작하더라구요. 처음 3개월동안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스러우니까 운동이 정말 재미있었죠. 6개월까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외지생활이다 보니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9개월이 넘어서니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나마 친구들이 있으니까 버틸 수 있었지 혼자 갔다면 아마 힘들었을 거에요.”

그리고 1년간의 브라질 생활에서 오범석이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언어 습득.
현지 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녀야 했던 오범석은 그 덕분에 브라질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포르투갈어를 익혔다.
이 때 배운 포르투갈어는 포항의 주축 멤버로 자리 잡은 산토스, 따바레즈 등과 원활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번 시즌 포항이 브라질 출신의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을 영입함에 따라 이 때 익힌 포르투갈어는 오범석에게 있어 더욱 가치 있는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감독과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

“현지 학교에서 영어, 포르투갈어, 컴퓨터를 배웠어요. 1년간의 학력이 인정되었죠. 지금은 많이 잊어먹긴 했지만, 그래도 브라질 사람과 웬만한 대화 정도는 돼요. 포항에서도 브라질 선수들과 훈련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특히 산토스는 수비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니까 더 대화가 필요하죠.”

브라질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다.

1년간의 브라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오범석은 한동안 적응하지 못하고 고전해야 했다. 브라질 축구와 한국 축구에서 요구하는 스타일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의 문제가 더 컸다. 브라질 유학파에 대한 주위의 기대가 오범석에게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사실 브라질에서는 특별한 스타일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자기 몸이 가는대로 움직이고 플레이하는, 자유가 많이 보장된 축구였죠. 반면 한국은 아무래도 팀 조직력을 많이 강조하는 편이구요. 그러나 오랜 기간 적응해왔던 스타일이기 때문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어요.”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이 컸죠. 브라질에 갔다 왔으니 뭔가 보여줘야한다는 부담감이죠. 그런 부담감이 있으니 볼 차는데도 욕심을 부리게 되고, 자연히 실수가 많아지게 됐어요. 저 뿐 아니라 같이 브라질 갔던 다른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아요. 6개월 정도 지나서야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죠. 김병수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던 것이 컸어요.”

브라질에서 돌아온 이후 오범석의 포지션은 오른쪽 윙백으로 굳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 중고 시절 측면/중앙 미드필더 및 스위퍼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던 오범석은 포철공고 시절부터 확실한 자기 포지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때(포철공고) 김병수 감독님이 오른쪽 윙백이 제일 취약하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를 그 자리에 세웠는데, 제 플레이가 만족스러웠나봐요. 그 때부터 계속 그 위치에서 플레이했어요. 가끔 3백 수비수로도 서고,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뛰었죠. 지금 포항에서와 비슷해요.”

이 당시 포철공고의 축구는 매우 이색적이었다. 고교팀답지 않게 세련된 축구를 보여준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2001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고교선수권에서 그들의 축구를 직접 본 후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기자에게도 있다.

지금은 고교축구팀 중에서도 스위퍼를 두지 않고, 지역방어를 기본으로 일자 수비라인을 구사하는 팀들이 많이 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스위퍼를 수비 깊숙이 두고, 맨투맨으로 상대 공격수를 마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와중에 포철공고의 축구는 아직 완벽함은 떨어졌지만, 공수라인의 폭을 좁게 하고, 수비라인이 일자로 배치되어 순간적으로 미드필드까지 라인을 끌어올렸다 내렸다하면서 매우 세련된 형태의 축구를 보여줬던 것.

“플레이하는 저도 신기했어요.(웃음) 그 당시 고교축구에서 이렇게 하는 팀은 거의 없었죠. 아쉬운 것은 전국대회 결승도 몇 번 진출하고 그랬는데, 정작 우승은 못해봤다는 거에요.”

“2학년 때는 수비에 중심을 두고, (권)석근이 형(현 고려대)과 (남)익경이 형(현 포항)이 공격을 주도하는 경기 스타일이었다면 3학년 때는 전체적으로 골고루 잘했죠.”

한편 이 무렵의 오범석에 대해 U-20 대표팀 동료였던 박주성(현 광주 상무)은 ‘고교축구계의 베컴’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오는 킥이 매우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범석의 킥은 매우 정확한 편이다.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매우 잘생겼다.

“어휴, 베컴은 주성이가 오버한거죠.(웃음) 제가 원래 킥이 정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포철공고 가서 김병수 감독님이 다른 방식의 킥을 가르쳐주셨죠. 저한테는 그 방식의 킥이 더 잘 맞더라구요. 그 때 이후로 킥이 많이 정확해졌어요.”

U-20 대표팀 시절 - 시작은 미약했으나...

고교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오범석은 3학년 시절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U-19 대표팀에 선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표팀 초창기 시절 오범석은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다소 투박한 맛은 있어도 투쟁심이 강하고 적극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조성윤(현 인천)이 주전 오른쪽 윙백으로 나온 것. 항상 팀의 중심이었던 오범석으로서는 첫 번째 시련이었다.

“고교무대에서는 나름대로 기술로 볼을 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청소년 대표팀에 들어가니까 체력과 강한 몸싸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초기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성윤이한테 밀렸던 것도 체력과 파워에서 뒤졌기 때문이죠.”

“학교에서는 수비를 해도 그렇게 압박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한쪽으로 몰아주기만 하고, 지역적으로 수비만 해주면 됐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별 무리가 없었구요. 그런데 박성화 감독님 스타일이 90분 내내 압박을 강하게 해주고, 몸싸움도 잘해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을 바꾸느라 초기에는 힘들었어요.”

“그래도 박 감독님 밑에 2년 동안 있으면서 수비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지금 프로무대에서 윙백이 아닌 3백 수비까지 소화할 수 있는 것도 박 감독님 덕분이라 할 수 있죠. 수비조직력 부분에서는 국내 최고이신 것 같아요.”

조성윤에 대한 열세는 2002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오범석은 박성화 감독의 축구 스타일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2003년 11월 수원컵을 계기로 주전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나름대로는 저도 충분히 될 것 같았는데, 후보로 밀려서 속이 많이 상했었죠. 그 때문에 ‘내가 경기에 뛰면 뭔가 보여주고 말겠다’는 오기도 생겼어요. 혼자서 산도 뛰고, 개인훈련도 열심히 하고, 또 청소년 대표팀에서 계속 있다보니 서서히 적응이 되더라구요.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생겼고, 기회만 달라는 마음 뿐이었죠.”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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