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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FA 사람들 ①] 기획실 김종윤 대리, “K2리그 전도사”


축구협회 기획실의 김종윤 대리님..k2리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당연히 k리그와의 승강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쏟는 분이다..

사람 좋으시고, 합리적이시고, 나를 너무 추겨세워주셔서 쑥스럽게 만들게도 하시는 분...^^
kfa 사람들의 첫 번째 주자..^^

2005년 1월 29일 인터뷰...


최근 몇년 동안 대한축구협회(KFA)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보였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20명 정도의 직원으로 운영되던 KFA는 2002월드컵을 거치면서 어느덧 62명의 대식구가 근무하는 조직으로 발전했고, 부서도 경기국-대외협력국-홍보국-기획실-총무부-사업국-기술교육부-심판실 등으로 전문화되어 각자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중 기획실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신설된 부서로 KFA의 중장기 계획에 대한 아이디어와 방향을 연구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수립하는 곳.
새로 시작되는 본 홈페이지의 'KFA 사람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소개할 김종윤 대리(35세)도 이곳 기획실 소속이다.

김종윤 대리는 KFA 공채 3기 출신으로 지난 2001년 10월 KFA에 입사했다. KFA는 1970년대에 1기 공채가 있은 후 2002월드컵을 앞두고 2001년 1월과 10월에 각각 2기, 3기 공채를 실시했었다.

KFA에 입사한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김 대리 역시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진로를 결정하는데 가장 큰 요인이었다. 경남 함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 대리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축구부를 지원했는데, 기초테스트에서 떨어졌어요.(웃음). 탈락 통보를 받고 울면서 집에 왔던 기억이 납니다.”

중고교 시절 입시에 쫓기며 축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김 대리는 부산대 경제학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광의 대열에 합류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그는 아침마다 선배들과 축구를 하는 재미에 빠져들었고, 매일 아침 수업시작하기 전에 2-3시간씩 축구를 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축구에 미쳐 지냈다.

“2년간 조기 축구 생활을 하면서 보니 학교 내에 축구동아리가 거의 없었어요. 공대 쪽에만 하나 있을 뿐 상경대 쪽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3학년 때 제가 팀을 만들었죠.(웃음)”

“상경대 계열 축구 동아리이기 때문에 이름을 제우스라고 지었어요. 경제할 때 ‘제’, 벗 ‘우’, 복수를 뜻하는 ‘S’를 합친 것이었죠. 경제학과 친구들이란 뜻이기도 하면서 축구의 신이 되자라는 뜻도 되죠.(웃음)”

이후 김 대리는 과외를 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새로 창설한 축구 동아리에 쏟아 부을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만약 그 당시 KFA에서 2종 클럽 등록을 받았다면 당장 가입해서 2종 클럽 선수로 뛰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KFA에 들어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2종 클럽 관련된 것이었고, 마침 그것이 KFA 10대 과제에 있었기 때문에 입사하고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었죠.”

이 무렵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바로 ‘부산대 운동장 사수 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1991년 김 대리가 입학할 무렵만 해도 부산대 운동장은 축구장 3개와 야구장이 들어갈 만한 큰 규모였다.  그런데 건물 지을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교측에서 서서히 운동장을 줄여나가더니 93년에는 마지막 남은 운동장에 학교본관 건물을 짓겠다고 통보한 것.

“매일 축구를 하던 저희로서는 어이가 없었어요. 2만명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운동장을 없애고, 대체 운동장은 산꼭대기에 지어주겠다니 말이 됩니까. 어느 날 아침에 축구하러 나갔는데, 학교 측에서 포크레인을 대동해 운동장 한 가운데를 파고 있더군요. 그래서 축구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포크레인을 막아섰고, 결국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어요.”

“오기가 생긴 우리 축구 동아리 회원들은 바로 삽을 빌려서 3시간이 넘게 포크레인에 의해 파여진 운동장을 원래대로 복구하고,  기어이 축구 한게임을 했습니다.(웃음) 총학생회에서도 고맙다고 막걸리 선물을 하기도 했죠. 결국은 본관 건물을 조금 이동해서 짓고, 축구장 1면 크기는 남겨두기로 결정이 났죠. 지금도 가끔 모교에 가면 그 때 기억이 나요.”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는 높은 분들이 운동장이나 스포츠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운동을 하기에 우리나라 환경이 정말 좋지 않다는 것도 새삼 느꼈죠.”

“그러니 축구협회에 와서 월드컵 잉여금으로 전국에 축구센터 3개와 축구공원 14개를 건립하는 일을 담당하게 됐을 때 제가 얼마나 신이 나서 일했겠습니까? (웃음)”

조흥은행 시절 - 신만길 대리와의 인연

김 대리는 대학을 졸업한 뒤 1997년 12월 조흥은행에 입사했고, 여기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계속됐다. 당시 조흥은행에는 축구선수 출신들을 중심으로 ‘복돌이’라는 축구팀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 대리도 여기에 가입한 것.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현재 KFA 대외협력국에서 일하고 있는 신만길 대리와의 인연도 시작됐다는 점이다.

“신만길 대리와 제가 조흥은행 입사동기였어요. 둘 다 축구를 너무 좋아했죠. 신입사원 연수 시절 축구 시합 할때 눈에 띄게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금방 가까워졌는데 바로 신대리였죠.  연수를 마치자마자 조흥은행 사내 축구팀에도 같이 가입했구요.”

“의정부에 있는 은행 기숙사에서 3년 동안 함께 지내다가 서울 삼선교 근처에 방을 얻어서 또 1년 정도 같이 하숙을 한 적이 있거든요. 둘 다 결혼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새벽까지 술마시며 축구 이야기를 하곤 했죠.  축구협회 욕도 많이 했어요(웃음)”

축구라는 공통화제로 인해 절친하게 지냈던 둘 중 먼저 축구계에 몸을 던진 사람은 신만길 대리였다. 2001년 1월 KFA에서 실시한 공채 시험에 응시한 신만길 대리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던 것. 그러자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김 대리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항상 마음속에는 축구 쪽 일을 하고 싶었는데, 먼저 신 대리가 가게 되니까 저도 몸이 달아 올랐죠.  신 대리가 컨페더레이션스컵 준비나 KFA 직원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때부터 은행 일이 손에 안잡히는 거예요. 그러던 차에 10월에 KFA에서 다시 공채를 한다기에 당장 지원했죠.”

발리에서 생긴 일

힘든 과정을 뚫고 드디어 KFA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김 대리는 두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역시 경제적인 문제. 조흥은행에서 상당히 좋은 보수를 받았던 그로서는 KFA로 옮기면서 수입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안정된 삶을 누리겠는가?’ 둘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했죠. 고심하다가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먼 인생을 볼 때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마침 축구협회 입사를 하는 시점이 신혼여행 직후였던 것. 신혼여행 가기 직전에 KFA 합격 소식을 들은 김 대리는 결국 신혼여행지였던 발리에서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고민끝에 신혼여행 첫날밤에 아내에게 실토했어요. 한국 돌아가면 은행 그만두고 KFA에 입사한다고... 집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랄 수밖에 없었죠.  아마 신혼 첫날 밤에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요. 결국 그날 밤 서로 등을 돌리고 자야 했어요.(웃음)”

“다음 날 오후에 해변가에 놀러갔다가 발리의 꼬마들과 웃통도 벗은 채 축구를 했거든요. 집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내가 이 사람을 잡아둘 수는 없겠구나.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자’ 이렇게 생각했다고...”

결국 아내의 마음을 돌리는데도 성공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또 닥쳐왔다. 당장 연봉에서 1천만원 이상의 마이너스를 감수해야 했고, 더 큰 문제는 은행을 관두면서 조흥은행에서 무이자로 융자받았던 전세자금 7천만원을 한꺼번에 갚아야 했던 것.

“친구한테 빌리고, 대출하고 그랬죠. 집사람은 교사 신분으로 보증서는 것이 부담스러운데도 해야 했고...내 욕심을 위해서 고생하는 거라 너무 미안했죠.”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은행 다닐 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지고, 적극적인 모습인 것 같아 좋다고..어려움 있었지만 잘 선택한 것 같다’고 집사람이 그러더군요. 고마웠죠.”

KFA의 중장기 계획을 연구, 추진하다.

KFA에 입사한 김 대리는 희망 부서로 기획실을 적어냈다. 당시 기획실에서는 ‘한국축구 10대 과제’를 선정하고, 한국축구가 10년 동안 나가야할 주제들을 정리, 연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한국 남자들은 모이면 전부 축구 전문가가 되잖아요. 저도 KFA 들어오기 전에 친구, 동료들과 ‘한국축구는 이래야돼, 저래야돼’ 그러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실 그런 팬들의 소리는 아우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현실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한국축구가 개선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연구하고 추진하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고, 기획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었어요.”

김 대리도 밝혔듯이 KFA 내에서 기획실이 신설된 것은 한국축구를 위한 중장기 발전계획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동안 KFA의 직원들은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실정이었고, 당연히 장기적인 시야를 갖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기획실은 당장의 업무에서 벗어나 축구협회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기초로 관련 부서와 협의해 함께 일을 추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것.

기획실에서 김 대리가 주로 맡았던 것은 2종 클럽 도입과 각종 제도 개선,  유소년 유망주 해외 유학 프로그램, 그리고 K2리그와 관련된 일이었다.

“2종 클럽 등록은 2003년부터 받기 시작했는데, 2002년 초부터 내부 준비를 했어요. 모두가 월드컵에 집중할 때 그 이후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2003년부터 각종 제도 개선,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한 세제 감면 제안, 서울프로팀 창단, 중고연맹 분리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등 다양한 부분을 연구했죠.”

“가장 큰 뼈대는 공부하는 축구선수 육성을 위해 축구환경이 어떻게 바뀌어야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였고, 또 하나는 축구저변확대였어요. 이것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행자부, 재경부, 문광부 등 각종 기관을 계속 들락날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김대리가 가장 전력을 다해 일했던 분야는 K2리그의 도입. 축구 관계자들 사이에서 김대리의 별명은 ‘K2리그 전도사’.  그만큼 K2리그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처음 실업축구연맹에 제안을 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뒤부터 각 실업팀들을 돌아다니며 K2리그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2007년 K리그와의 업다운제 실시라든가 2010년까지의 K2리그 비전을 설명했더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2002년에는 각 팀에게 다음 시즌 전까지 팀 연고를 모두 맺으라는 과제를 던졌고,  2003-04년까지는 준비기간의 개념, 2005-06년까지 세미프로기, 2007년 이후는 프로 2부리그 시기로 설정해서 비젼을 제시한 것. 이런 노력 덕분에 2003년부터 실업축구는 프로 2부를 목표로 K2리그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올해부터 세미프로기인데, 현재로선 계획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영에 있어서 지역민들이 많이 참여하는 문화를 이룩했다는 점이에요. 서산의 예를 들 수도 있는데, 어쨌든 대부분의 팀들이 지역 축구팀, 지역 협회, 체육회, 지역 시민모임 등 적어도 네 파트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원봉사 식으로 홈경기를 개최합니다.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지역주민들의 참여문화가 나름대로 만들어졌고, 자연히 조금씩 지역연고가 뿌리내렸죠.”

“또 한 가지는 K2리그를 통해서 중소도시에서도 프로팀에 준하는 성인 축구팀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점이에요. 그 동안 지역 중소도시 같은 경우 프로팀은 정말 돈많은 기업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신생팀 창단을 위한 창구를 실업연맹과 기획실에서 열어놓고 있는데, 창단 문의를 해온 곳이 6-7군데 됩니다. 올해 벌써 창원시청이 들어온다고 하고, 그 이후에도 적어도 2-3팀은 가능성이 높아요.”

발전 속도 느려 보일 수도 있지만, 한 단계씩 발전하는 모습 보이겠다.

이제 김종윤 대리가 KFA에 몸 담은지도 3년이 넘었다. 단지 축구팬의 입장에서 바라보던 축구와 축구행정의 일선에서 바라보는 축구 간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김 대리 역시 마찬가지다.

“밖에서 저도 축구팬 시각으로 봤을 때는 ‘뻔한 답이 있는데도 왜 안될까?’, ‘어째서 축구협회는 똑바로 못하나?’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막상 들어와서 보면 축구협회 힘만으로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분명히 있어요. 객관적으로 우리의 인프라가, 우리의 축구문화가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죠.”

“축구협회가 하는 일의 양에 비해 바깥 사람들은 그다지 잘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KFA에서 일한지 4년이 조금 못되었는데,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축구협회 내부에서는 훨씬 많은 변화들이 생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문제인지 모른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한정된 정보를 통해 유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론의 특성상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이슈화시키다 보니 외부에서의 인식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협회의 정책에 대해 팬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시도가 조금 부족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여러가지 현안에 대한 KFA의 입장과 정책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코너가 조만간 KFA 홈페이지에 생길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축구팬이든, 내부에서 축구행정을 담당하는 우리들이든 모두 한국축구를 사랑한다는 점은 똑같잖아요. 서로를 이해하고, 때로는 질책도 하면서 함께 발전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봐요.”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한국축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보고서를 작성하다보니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돼요.  특히 축구가 발달한 나라에 대한 사례 공부도 많이 해보고 싶고, 그 사례가 한국 현실에 적합한지 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잉글랜드 등 축구 선진국으로 나가서 한번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현재 위치에서 더 공부하고,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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