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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무 이야기> 곽태호 대리①,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며”

칼스버그컵 참가차 홍콩에서 윤정환과 함께

2003년 12월 10일 KFA 홈페이지 기사..


축구팀에 있어서 주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선수단 전체를 챙겨주고 내조해주는 팀의 살림꾼 같은 역할인 것이다.

팀과 축구협회의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훈련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챙겨줘야 하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무가 받는 육체적 어려움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일례로 94 미국 월드컵 당시 주무였던 이해두 경기국 차장(38)은 94 월드컵 도중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병원에 실려가는 일도 있었을 정도.

물론 지금은 국가대표팀 스태프의 업무 분담이 보다 다양해져 이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지만 여전히 20-30명에 이르는 식구들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이 코너는 대표팀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해온 역대 대표팀 주무들의 추억담과 숨은 이야기들을 직접 회고하는 무대이다.

이번에는 김대업 대리(2002 한일 월드컵 주무)와 이해두 차장(94 미국 월드컵 주무)에 이어,  세번째 인물로 96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과 97 말레이시아 및 99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선수권 U-20 대표팀 주무를 지냈던 경기국 곽태호 대리(32)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1991년 축구협회에 입사한 나는 지금까지 13년간 경기국에서만 일해왔다. 처음으로 주무를 맡았던 팀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이었는데, 국가대표팀인지라 당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홍명보, 황선홍 같은 선수들이 모두 형뻘인지라 형이라고 부르고 지냈다.  그러나 이 팀은 국내훈련에서만 내가 도와주고, 히로시마에 같이 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맡은 팀이란 느낌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이후에 맡은 팀이 바로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는 비쇼베츠 감독님의 올림픽 대표팀이었다. 이 팀은 처음 소집된 1994년 11월 중순부터 96 아틀랜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거의 2년여를 동고동락했었기 때문에 선수들과 정이 들대로 들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내가 맡은 첫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수들도 모두 나보다 어렸고, 또한 당시만 해도 프로선수 없이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됐었다.

지금이야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행을 택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그 때만 해도 대학졸업 후 프로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윤정환은 동아대, 이운재는 경희대, 서동명은 울산대, 이기형은 고려대, 이민성은 아주대 등 모두 대학 소속이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프로가 아닌 대학생들이어서 그런지 대체적으로 선수들이 순수한 면이 많았고, 서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쇼베츠 감독님과의 첫 만남

처음 소집됐을 때 감독님이 외국인이었고, 더군다나 다소 접하기 힘든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무척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올림픽대표팀을 맡기 전에도 94 미국월드컵 기술고문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처음에는 통역으로 한국인을 썼는데, 올림픽대표팀이 구성되면서 비쇼베츠 감독님의 요청으로 러시아인을 통역으로 새로 뽑았다. 러시아에서 한국어과를 나왔고,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분이었다.

이렇게 통역이 바뀌게 된 것에는 비쇼베츠 감독님의 오해도 있었다. 한국인 통역의 경우 감독님의 말씀을 선수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살도 붙여서 편하게 전달하곤 했는데, 감독님은 자신이 뜻한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한 마디를 했는데, 왜 당신은 두 마디를 하느냐. 내가 하는 말만 전해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뀐 러시아인 통역은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셨다. 축구용어에서도 모르는 부분이 있곤 해서 감독님이 원래 의도한 것과는 달리 선수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에 약간의 문제도 있었다.
또 한국어로 전달할 때 조금 돌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너무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문제가 생겼던 적도 출범 초기에는 간혹 있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코치분들이 축구에 대한 부분을 통역에게 많이 가르쳐줬고, 선수들과도 친분이 쌓이면서 이런 부분은 많이 해소되었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공산국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출범 초반에는 축구협회에서 나왔다고 하면 일단 자기를 감시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 역시도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식사도 따로 하는 등 거리감을 뒀기 때문에 당시에는 꽤나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름대로 문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팀 지원에만 신경쓰며 묵묵히 뒷바라지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독님도 ‘이 친구가 나를 도우러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는지 같이 식사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마음을 여셨다.

96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본격적인 출발

올림픽대표팀은 1994년 11월 중순에 마산에서 첫 훈련을 실시했고, 11월 27일과 29일에 창원에서 러시아 올림픽대표팀을 초청해 첫 번째 공식 평가전을 가졌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부임 초기부터 수비 위주의 축구를 구상하셨고, 일단 선수들의 체격조건을 비중있게 평가하셨다.

그래서 윤정환(현 성남) 정도를 제외하고는 선수들의 신장이나 체격조건이 월등히 좋았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정환이도 올림픽대표팀 출범 초기에는 붙박이 주전은 아니었다. 당시 정환이와 경쟁했던 선수는 김재영(현 부산)이었다.

재영이는 187cm의 좋은 신체조건을 가졌으며, 미드필더로서의 감각도 있어서 처음 소집됐을 때는 정환이보다 더 감독님의 주목을 끌었었다. 러시아와의 2차례 평가전에서도 1차전은 정환이가 선발로 출전하고, 2차전에서는 재영이가 선발 출전하며 경쟁을 펼쳤었다.

그러나 이 평가전을 통해서 비쇼베츠 감독님은 윤정환을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후 정환이는 붙박이 멤버이자 팀 공격의 핵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1995년 벽두부터 올림픽대표팀은 호주 친선대회와 홍콩 칼스버그컵, 홍콩 다이너스티컵에 연속으로 출전하며 많은 실전경험을 쌓았다. 당시 선수들은 모두 대학생 신분이었고, 프로행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기에 모두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대표선수로서 올림픽이란 큰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외국인 감독을 처음 접하는 것이기에 선수들의 각오는 더욱 남달랐다.

먼저 95년 1월 호주친선대회에서는 일본, 호주, 덴마크 올림픽대표팀과 경기를 펼쳤는데 첫 경기였던 일본전에서는 이후 한국팀의 주요 득점루트가 되어버린 윤정환 도움-최용수 득점의 패턴으로 1-0으로 승리했다. 이후 박충균의 득점으로 호주와 1-1로 비겼고, 덴마크와는 두 번 경기를 펼쳐 1무 1패를 기록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 처음 나가보는 선수들도 여럿 있었고, 더군다나 올림픽대표팀의 첫 해외전지훈련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설렜던 것 같다. 한국은 한겨울인데다가 잔디도 별로 좋지 않았고, 훈련도 동대문과 잠실 등을 떠돌아다니면서 해야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마산이나 창원 같은 지방에서 훈련하고 했었다.

그런데 호주에 오니 날씨도 따뜻하고, 자연환경이나 잔디 상태도 훨씬 좋다보니 선수들도 만족하고 좋아했다. 다만 음식문제는 주무로서 다소 골치였다. 지금은 선수들의 식성이 많이 서구화되어 별 문제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선수들이 음식을 많이 가리고 한국음식을 찾곤 했다. 출발할 때 김치 10박스를 갖고 갔지만 1주일 만에 동이 나서 한인회를 통해 김치를 수소문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1월말에 홍콩 칼스버그컵에 참가했는데, 이 대회에는 유상철, 고정운 선수가 와일드카드의 성격으로 합류한 바 있다. 먼저 콜롬비아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이들을 기용하지 않고 전원을 올림픽대표팀 선수들로 구성해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앞으로 비쇼베츠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판이었다.

한국은 수비 위주의 전술로 강호 콜롬비아의 공세를 막은 뒤 전방의 최용수를 이용한 역습을 노리며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후반 초반 윤정환의 단 한번의 송곳같은 패스가 최용수에게 연결됐고, 결국 이것이 결승골이 되어 1-0으로 승리했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공격력보다는 수비력을 우선시했고, 최용수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수비에 가담하는 형태의 시스템이었다.

기본적으로는 3-6-1 시스템이었지만, 일부에서는 9-1 시스템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축구팬들에게 재미없는 축구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안정성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많이 실점하지도 않았고, 거의 1-0이나 1-1 같은 스코어를 기록하곤 했었다.

다시 칼스버그컵으로 돌아가면 콜롬비아를 꺾고 결승에 오르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팀은 유고였다. 당시 유고팀에는 스토이코비치 등 쟁쟁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유상철과 고정운 선수를 투입했지만, 결국 0-1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월 중순에는 다시 홍콩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에 참가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국가대표팀이 참가했기에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올림픽대표팀에 유상철, 고정운, 홍명보 선수가 와일드카드로 참가한 형태였다. 특히 고정운 선수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며 팀분위기를 잘 이끌었던 것 같다. 특유의 우직한 리더쉽이라고 해야할까.

반면 아쉽게도 홍명보 선수의 경우 비쇼베츠 감독님과 불화를 겪으며 중국과의 1차전만 출전하고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어쨌든 우리는 1,2차전 중국 및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0-0, 1-1무승부를 기록하며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고, 홍콩리그선발팀에게 3-2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에서 또다시 일본과 맞서게 됐는데, 이기형이 특유의 벼락같은 강슛으로 2골을 기록했고, 결국 2-2 무승부로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3-5로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22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이 하시라타니, 기타자와, 야마구치, 나라하시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일본의 국가대표팀과 맞대결을 펼쳐 좋은 승부를 펼쳤다는 점에서 만족할 만 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팀의 핵심전력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었던 조진호가 결국 팀을 떠나게 된 점이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거의 고정된 주전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스타일이었고, 진호는 주전구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당시 진호는 94 미국월드컵에서도 뛰며 한창 주가가 치솟아 경희대에서 포항에 입단하면서 최고 대우을 받으며 가려는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올림픽대표팀의 연습경기에서는 해트트릭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예고했었다.

그러나 비쇼베츠 감독님의 기본적인 구상은 윤정환-최용수 라인이었다. 포지션상 진호가 정환이의 자리에서 뛰는 것은 힘들었고, 용수와 경쟁을 해야했는데 감독님은 용수를 워낙 신뢰하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체격조건이 좋은 선수를 선호하셨기 때문에 용수가 혹시 부상을 당하더라도 이우영에게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에서도 진호를 기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이 있었고, 무엇보다 진호 자신이 불만이 쌓였다.

그래서 진호는 감독님과의 개인면담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결국 비쇼베츠 감독님이 선택한 것은 진호의 중용보다는 기존 라인의 유지였다. “내 스타일대로 가겠다. 성적이 말해줄 것”이라는 것이 비쇼베츠 감독님의 입장이었고, 이것을 수용할 수 없었던 진호는 대표팀을 떠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사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의 경우 출범 초기부터 주전멤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후보 선수들의 불만이 분명히 있었고, 진호의 경우 이미 명성 높은 스타로서의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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