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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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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90년대 스트라이커 킬러’ 박광현, “유소년 지도자로 제 2의 축구인생 시작”


선수 시절 이 선수 욕도 참 많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하는 포항을..그것도 황선홍, 라데를 정말 엄청나게 거칠게 괴롭혔던 선수니까..^^

근데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는 그를 만나 이야기하니..그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암튼 그런 감정을 느꼈다..
같이 세월을 먹어가는 처지라서 그런가..-_-;
그 시절 축구를 같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인가..^^
암튼 지도자로서 멋진 삶을 살아가시길~

2004년 6월 17일 KFA 홈페이지 기사..


이제 한국 프로축구도 20년이 넘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스타들이 K리그 무대를 누비며 축구팬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또 세월의 흐름 속에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져가기도 했다.

K리그를 거쳐간 그 수많은 선수 중에는 축구팬들의 사랑과 갈채를 한 몸에 받으며 빛나는 축구인생을 보낸 선수들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음지에 속해 때로는 축구팬들의 비난도 감수한 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선수도 있다.

오늘 소개할 박광현(37세, 용인 FC 고등부 지도자) 코치의 경우 후자라고 볼 수 있다.
1989년 K리그에 데뷔한 박광현은 1999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11년 동안 현대(현 울산현대, 1989-1991년)와 일화(현 성남일화, 1992-1999년)를 거치는 동안 특유의 터프한 수비를 바탕으로 ‘스트라이커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K리그 역대 최다 경고(54회)와 최다 퇴장(5회) 기록 보유자인 박광현은 특히 1995년 포항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황선홍과 라데를 수비하며, 터프하면서도 끈질긴 수비를 보여 당시 포항팬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현역 시절을 돌이켜볼때 “그때 조금 더 축구를 알고 했었으면...”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는 박광현은 은퇴후 단국대 플레잉 코치를 거쳐 2002년부터 용인 FC의 고등부 지도자(백암종고 코치)로 활동하며 어린 유망주들을 키워내는데 힘을 쏟고 있다.
자신의 현역 시절 한계를 분명히 느끼고 있는 박광현은 축구를 알고 수비를 하는 그런 수비수를 키워내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럼 90년대 중반 K리그를 풍미했던 박광현의 그 당시 이야기와 현재 유소년 지도현장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들어보도록 하자.


- 90년대 중반 K리그에서 악착같이 상대 공격수를 막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99년을 끝으로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은퇴 후에 어떻게 지냈는가?

은퇴하자마자 단국대에 플레잉 코치로 들어갔다. 고교(전북 김제상고) 때 스승이셨던 하상섭 단국대 감독님이 그 전부터 단국대에 와서 도와달라고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당시에는 프로생활을 하느라 힘들었다.
단국대에 갈 무렵에도 사실은 프로에서 더 뛸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교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싶은 맘이 있었다.  그래서 단국대에 입학해 플레잉 코치로 뛰었다.

- 대학의 어린 선수들과 같이 뛰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그때까지만 해도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뛰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코치이기 때문에 애들에게 솔선수범해야 된다는 점, 실수를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점이 부담스럽긴 했다.

- 단국대에서 용인 FC로 옮기게 된 계기가 있다면.

1999년 프로에서 뛴 마지막 해에 천안 일화가 FA컵 우승을 한 뒤 팀에서는 조금 더 선수로 뛰어달라는 말도 있었고, 안양(현 서울)의 조광래 감독님도 오라고 했지만 단국대행을 선택했다.

하상섭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만으로 갔는데, 막상 학교 측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플레잉 코치이다 보니 특기생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학교에서는 코치로 발령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까 6개월가량 월급이 하나도 없었다.
6개월이 지나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광래 감독님이 단국대와 연습게임할 때마다 지금이라도 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결국 하상섭 감독님께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이 내 월급을 마련해주셨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코치로 인정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님이 사비를 털어 매달 월급을 마련해주신 것이었다.  

그 뒤에 단국대가 대학대회에서 19년 만에 우승하고, 나 역시 코치상을 받으며 잠시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학생인지, 코치인지 애매한 위치였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래 일체 하지 않았던 술담배도 하기 시작했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2년 정도 하다가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1년 반 동안 내 월급을 마련해주시느라 너무 힘드셨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힘들고...

그러고 나서 잠시 쉬다가 용인 FC로 가게 됐다. 허정무 감독님과 한 팀에서 같이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천안일화 시절 숙소가 용인이었고, 나 역시 용인에서 오래 살았었다. 그래서 지역분들과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용인 FC에 몸담게 됐다.

-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예전 이야기들을 해보자.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것이 고교 시절부터라고 들었다.

그렇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한 셈이다. 해남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하상섭 감독님과 인연이 닿아서 고교 1학년 10월에 김제상고로 전학했다. 12월부터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으니까 사실상 고2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 89년에 현대(현 울산현대)에 입단했는데, 축구명문 출신도 아니고 유명세도 없었던 상황에서 프로입단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86년에 김제상고를 졸업하긴 했는데, 2년 축구하고 대학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대학을 못가고 소속팀 없이 떠돌았다. 마침 고향에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가 하나 있어서 후배들과 같이 운동을 했다.

그런데 꿈이 있고, 포기하지 않으니까 기회가 주어지더라. 그렇게 지내고 있다가 이영무 감독님(현 김포 할렐루야 감독)을 만나서 엠마누엘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엠마누엘팀은 실업팀도 아니고 선교팀이었고, 보수도 없었다.

그렇게 거기서 2년 반 정도 있다가 현대자동차 아마추어팀에 들어가게 됐는데, 우연찮게 현대 프로팀과 같이 충무에서 동계훈련을 하게 됐다. 현대와 연습게임도 많이 했는데, 그때 현대 감독님이었던 김호 감독님이 나를 잘 보셨는지 계약을 하자고 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했다.(웃음)

정말 감개무량했다. 4년 정도 축구를 해서 프로라는 최고무대에 갈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 89년부터 91년까지 3년간 현대에서 뛰었는데, 이후 일화 시절에 비해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실 현대에 있을 때도 많은 기회가 있었다.  89년 첫 해의 경우 동계훈련이 끝난 시점인 3월이 되어서야 팀에 합류했음에도 14경기에 출장했다. 김호 감독님께서 나를 좋게 보셨던 것 같다.

다음 해인 90년부터 1,2군 제도가 마련되었고, 마침 2군으로 대통령배 대회에 나갔는데, 경기 중에 폭행문제가 일어나면서 6개월 정지를 당했다. 결국 프로경기에도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91년에 차범근 감독님이 새로 오셨다. 사실 동계훈련 기간에는 최영일 선배보다도 내가 차 감독님으로부터 더 신임을 받았었다.(웃음)

그런데 동계훈련을 마치고 가진 마지막 연습게임에서 다치는 바람에 6개월 정도를 쉬어야 했다. 다쳐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일화로 트레이드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왔더라.(웃음)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 아무래도 팀을 옮긴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처음부터 자리를 꿰차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더군다나 나 같은 경우 거액을 들여서 데려온 선수도 아니고, 거의 방출과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적한 뒤에도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부분에서 힘든 점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운동하면서 가장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성격 자체가 낙천적이며,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기보다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을 뿐이다.(웃음)

이런 점이 통했는지 이적 첫해부터 17게임을 뛰었고, 이후 줄곧 매년 20게임 이상씩은 뛰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첫 해부터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생각하지만, 팀의 중심선수로 인정받고 뛰기 시작한 것은 94년 정도였던 것 같다.

- 박종환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박 감독님이야 원체 알려진대로 카리스마가 넘치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선수들을 단련시키는 분이었다. 하지만 지내다보니까 정이 참 많으신 분이었다.(웃음)

- 당시 현대와 일화를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었나?

가장 큰 것은 숙소 분위기와 훈련 분위기였다. 현대의 경우 팀 훈련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일화에 와서 놀랐던 것이, 저녁 먹고 나서 8시 정도만 되면 선수들이 TV를 보다가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이었다. 당시 일화 숙소가 남산 근처의 후암동이었는데, 선수들이 밤마다 몰래 줄넘기 허리에 메고, 남산에 올라가 개인운동을 하더라.

운동에 전념하고, 뭔가 해보려는 의지 같은 것이 남달랐다. 그 무렵 현대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 즉 선수들의 하고자 하는 의지, 경쟁의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 약간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K리그 역대 최다 퇴장 및 경고 기록을 갖고 있다. 알고 있었는가?

나도 몰랐는데, 용인 FC 와서 알았다.(웃음) 내가 터프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 기록이 있기까지 나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웃음)

심판들의 블랙리스트에 한번 오르니까 가중처벌을 받은 느낌이 있다. 내가 볼 때 경고상황은 아닌데, 심판들은 내가 고의적이었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많았다. 퇴장 당했던 상황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조금 억울했던 상황도 많았다.

- 이제 95년 챔피언결정전 이야기를 해보자. 이 승부는 K리그 역대 챔피언결정전 중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당시를 회상해본다면.

그때 전기리그에서 우리가 우승하고, 후기리그에서 포항이 우승을 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 내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안)익수형, (이)영진이, 겐나디와 주로 3백을 섰는데, 내 몸 컨디션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시즌 후 대표팀에도 뽑혔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잘했던 것 같다.

다시 경기 이야기를 해보자면 포항에는 K리그 최강 투톱이라고 불리우던 라데와 황선홍이 있었다. 선홍이는 1년 후배인데, 경기장에서도 자주 맞대결을 펼쳤고 거친 몸싸움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정말 훌륭한 선수이자 타고난 스트라이커였다.
‘이런 스트라이커가 다시 한국에 나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부상이 잦아서 더 클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선홍이를 실력으로 붙잡는다는 것은 힘들었다. 3-3으로 비겼던 2차전에서 내가 선홍이를 전담마크 했었는데, 전반에만 선홍이에게 2골을 내주고 말았다.
3-2로 우리가 역전시킨 상황에서 종료 3분을 남겨놓고 우리가 프리킥을 내줬는데, 당시 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선홍이만 잡았다.(웃음) 선홍이가 사람이 정말 괜찮은데, 계속되는 신경전이 화가 났는지 그때 주먹으로 내 얼굴을 쳤다. 그 상황에서 볼이 흘러 라데가 헤딩 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박종환 감독님이 나중에 비디오로 그 장면을 보면서 혼을 냈던 기억이 난다.(웃음)

- 라데와도 악연이 있지 않았는가?

사실 라데 역시 내 실력으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웃음) 그런데 라데는 굉장히 다혈질이라 신경전을 벌이면 흥분하곤 했다. 가서 욕도 하고, 슬쩍 차기도 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흥분해서 자기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막기가 너무 힘들어서 라데의 그런 성격을 많이 이용하곤 했다.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도 내가 붙어 다니면서 신경전을 벌여 결국 라데가 퇴장 당하도록 만들었다.(웃음)

당시 포항 감독이셨던 허정무 감독님을 용인 FC에서 다시 만나 그 때 이야기를 했더니 "광현이 너 플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파울이었다"고 말씀하셔서 함께 웃었다.(웃음)

- 라데가 한국을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정종선과 박광현 코치를 가장 독종으로 꼽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웃음)

운동장에서 페어플레이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승리를 위한 심리전 역시 필요한 부분이다. 내가 판단했을 때 스피드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라데를 이길 수가 없었다. 내가 라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 선수가 엄청난 다혈질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공격수와 수비수의 숙명 같은 것 아닌가 싶다.

그래도 운동장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적이 아니라 동료 아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우리 일화팀이 아시아클럽선수권을 위해 출국하는 길이었는데, 공항에서 휴가를 떠나는 라데를 만났다. 우리 선수들과 전부 악수를 나누던 라데가 내가 악수를 하려고 하자 멈칫 하더니 “우이씨”하면서 그냥 가버리더라.(웃음) 맺혔던 것이 많았던 것 같다.(웃음)

어쨌든 라데도 그렇고, 선홍이도 그렇고...그런 선수들을 전담마크하고, 운동장에서 같이 맞붙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 당시 맞붙었던 공격수들 중에 이들 외에 특별히 기억나는 선수가 있는가?

다른 선수들은 내가 볼 때 거의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선홍이의 경우는 특별하다. 같이 뛰면서도 ‘정말 훌륭한 선수다, 모든 것을 갖추고 타고난 선수구나. 같은 선수이지만 레벨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 당시 일화가 3연패를 했을 때 많은 축구팬들은 너무 수비 위주가 아니냐라는 불만도 있었고, 경기내용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데.

당시 다른 팀에서 뛰었던 선수들을 지금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일화가 수비축구를 했다는 말보다는 일화 수비수들이 악착같고 끈질긴 맛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 모습 때문에 팬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일자수비에 지역방어를 쓰곤 하지만, 그 때는 3백에 스위퍼 한명을 두고, 스토퍼를 2명 기용하는 포메이션이었다. 2명의 스토퍼는 게임 전에 전담마크 상대를 배정받게 되는데, 그러면 90분 내내 그 선수만 따라다니게 된다.

전담마크가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선홍이를 전담하고, 다른 선수가 라데를 마크하고 있었다면, 라데에게 노마크 골 찬스가 갔다 하더라도 나는 선홍이를 마크하는 정도였다.(웃음)
만약 자기 마크맨에게 골을 허용했을 경우 박 감독님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웃음)

그 정도로 자기 마크맨에 대한 책임감을 많이 강조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수비수들이 굉장히 거칠고 타이트했다. 아마 그런 부분 때문에 수비축구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프로축구가 너무나도 성적 지상주의였기 때문에 축구팬을 생각하는 축구는 아니었다. 패스가 연결되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타이트하다보니까 패스 1-2개가 제대로 연결되지 못했다. 요즘 들어와서 많이 변화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조금 더 팬들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상대를 봐주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 현역 시절 ‘스트라이커 킬러’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 별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내가 경고나 퇴장이 많았고, 터프한 플레이로 상대 스트라이커를 상대했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주어졌지만, 차라리 조금 약하더라도 축구를 좀 알고 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남의 김학범 코치님을 통해 축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 내가 프로에서 11년 동안 뛰었는데, 처음 10년보다 김 코치님과 함께 했던 마지막 1년 동안 배운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축구를 정말 많이 연구하시는 분이고, 축구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분이시다.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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