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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백승철, “부상으로 선수생활 마감해야했던 불운의 캐논슈터”


2004년 11월 23일 KFA 인터뷰..


백승철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오른발, 왼발 가리지 않는 강력한 중거리슛이었다. 다른 선수들처럼 킥을 하는 과정이 길지 않고, 짧은 동작 속에서 임팩트를 강하게 주는 것이 그만의 비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슛에 대한 기초를 충실히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연습한 결과가 프로에 와서 만개했던 것이다.

“사실 제가 느낄 때는 제 슛이 반 박자 빠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빠르다고 하시더라구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슛에 대한 기본기를 잘 배웠다고 할수 있어요. 킥하는 순간은 힘도 힘이지만, 정확성이 중요한데 그 점을 충실히 배운거죠.”

“보통 다른 선수들은 슛을 하는 순간 허벅지까지 이용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슈팅을 빨리 가져가기 위해 발목과 무릎만 사용했어요. 어쨌든 옆구리가 결리도록 슈팅 연습을 했었죠.  때리는 순간에 집중해서 말이죠.”

백승철의 이런 특기야말로 그가 전형적인 스트라이커가 아니었음에도 많은 골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원인이 됐다.  거기에다 당시 포항에는 박태하와 고정운이 좌우에서, 자심 또는 최문식 등이 중앙에서 적절하게 볼배급을 해주며 백승철에게 많은 득점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중앙에서 자심이나 문식이 형이 정말 잘해줬어요. 특히 문식이 형은 저나 동국이가 공간으로 돌아들어가면 기가 막히게 탁탁 연결해줬어요. 공격수의 움직임에 따라 발 앞으로 정확하게 연결해 주는데 어느 공격수가 못할 수 있겠어요?  정운이 형은 빠르고 힘있죠. 태하 형은 성실하게 팀플레이를 하면서 제공권에서도 탁월하죠. 자심도 중요할 때마다 골을 넣어주죠.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뤘어요.”

“개인적으로 득점을 많이 했던 이유를 꼽자면 골대 앞에서 예측 능력이 남들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경기 상황에 따라 킥이 날아올 상황, 패스하기 힘든 상황이 오면 미리 받기 좋은 위치로 움직였죠. 그리고 감독님이 골게터는 골문이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때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볼 트래핑 해놓고 골대가 보이면 무조건 때렸어요. 두드리면 열리는 거죠.(웃음) 슛 상황에서는 그 한 가지에만 집중했구요.”

백승철도 밝혔듯이 당시 포항의 힘은 고참과 신예의 적절한 조화였다. 미드필드의 박태하, 고정운, 서효원 등과 수비진의 안익수, 이영상, 공문배 등 고참급 선수들이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 뒤를 자심, 전경준, 최문식 등의 중견급 선수가 받쳤다. 여기에 백승철, 이동국, 이승엽, 싸빅 등 새로 입단한 선수들이 파이팅을 보여주면서 팀의 시너지 효과는 극대화됐다.

어느 팀이든 정상급 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참과 중견, 신예의 조화가 잘 이뤄져야 하는데, 1998년 포항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고참 형님들이 엄청나게 열심히 뛰어요. 수비하는 형님들도 몸 사리지 않고 터프하게 태클을 시도하셨고...반면 미드필드나 공격진에는 젊은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형님들이 원체 열심히 뛰어주니까 안 뛸 수가 없었죠. 그러다보니 팀도 잘 굴러가고..”

“그 때는 서로 너무 잘 맞았어요. 놀고 즐기다가도 형들이 ‘우리 한번 해보자!’그러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모두 다 같이 하려는 신뢰와 의지가 대단했죠. 그래서 팀이 상승세를 타고 리그 막판에 1위까지 넘보게 됐죠.”

결국 포항은 리그 마지막 경기 안양(현 서울)전 결과에 따라 리그 1위로 올라설 수 있는 찬스를 맞이했다. 안양 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그 경기에서 백승철은 선제골을 넣으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이후 포항은 서효원이 1골을 추가하며 후반 45분이 될 때까지 2-1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포항 서포터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축가를 부를 기세였다. 그러나 프로세계의 승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후반 종료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코너킥을 얻은 안양은 전원이 공격에 가담했고, 올라온 코너킥을 무탐바가 헤딩슛, 포항의 골문을 열었다.
이 통한의 무승부로 결국 포항은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리그 1,2위를 울산과 수원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4위 전남과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하는 신세가 됐다.

“그 경기만 잘 마무리했으면 리그 1위로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하는 건데 너무 아쉬웠죠. 서포터들도 샴페인을 준비했다고 하고..우리도 그런 마음이었는데, 막판에 난데없이 무탐바가 나타나는(?) 바람에...감독님이나 선수들이나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한탄 많이 했어요.”

“그 때 우리가 5분 남겨놓고 실점하는 징크스가 있었어요. 그 마지막 5분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 몇 번 있었다고 기억해요. 플레이오프 울산전 2차전 때도 그랬고...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저로서는 잘된 것이었을 수도 있어요. 결국 3위로 밀려나면서 플레이오프도 치르게 됐고, 울산전에서 제가 그 슛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뭐 지금에야 그런 생각을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분하고 안타까웠죠.”

전율의 1998년 플레이오프

1위 등극을 눈앞에 두고 3위로 밀려난 포항은 전남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승부차기승을 거두고 플레이오프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을 기다리는 상대는 울산. 포항으로서는 10월 14일 안양과의 리그 최종전과 17일 전남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팀의 주축인 박태하와 고정운이 경고누적으로 1차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이동국마저 아시아 청소년대회 차출로 합류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

“그 때 정운이 형이나 태하 형, 동국이까지 빠지면서 홈경기이긴 했지만, 힘든 경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거기에다 울산에는 그해 득점왕 유상철, 도움왕 정정수, 김현석, 김종건, 김병지 등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신 투입된 (전)경준이 형, (김)후석이 형, (김)명곤이 형이 잘해주면서 좋은 경기를 펼쳤어요.”

전반 16분 울산의 정정수에게 선제골을 내준 포항은 후반 12분 김명곤의 골로 따라붙었고, 후반 44분에는 최문식이 역전골을 터트리며 극적으로 승부를 마무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인저리 타임이 적용되었던 후반 48분, 울산 김종건에게 헤딩슛을 내주며 2-2 동점을 허용했다.  포항 선수들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포항팬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2-1로 경기가 마무리됐구나 싶었는데, 정규리그 안양전처럼 또 막판에 그렇게 실점한 거에요. ‘몇 분 남았다고 이렇게 또 실점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모두들 이제 비겼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날 경기가 인저리 타임이 조금 길었어요. 후반 51분에 문전 앞에서 프리킥 기회가 왔어요. 내가 항상 생각했던 그 상황이 일어난 거죠.”

2-2 동점에서 이제 인저리 타임도 거의 끝나고 경기 종료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 시점에서 얻은 귀중한 프리킥 찬스.  페널티 에리어 왼쪽 바깥, 약 25미터 지점이었다.
포항의 키커는 당연히 벼락 슈터 백승철이었다.

“(서)효원이 형이 옆으로 살짝 밀어줬고, 저는 달려오는 상대 수비를 보고 바로 슈팅하지 않고 수비를 제친다음 한 번 더 밀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오른발슛을 쏘았어요. 머리 속으로 몇 번이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것을 한번 시도했는데 제대로 맞았죠.(웃음) 아웃사이드로 맞아 휘어나갔는데, 그 순간은 아마 죽을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가끔 그 경기 비디오를 돌려서 봐요. 보고 있으면 지금도 흥분이 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꽉 찬 관중들과 후반 51분, 저의 중거리슛까지, 너무 극적이었잖아요.(웃음) 아마 저를 기억하고 있는 축구팬들은 대부분 그 경기 때문에 알고 계신 분들일 겁니다.”

1차전에서의 극적인 승리 후 포항의 팀 분위기는 최고조에 올랐다. 그리고 맞이한 울산에서의 2차전.

포항은 팀의 정신적 지주 박태하와 고정운까지 정상 가동되면서 챔피언결정전을 자신했다. 후반 40분 고정운의 도움을 받아 박태하가 1-1 동점골을 터트렸을 때만 해도 모든 축구팬들은 합계 전적 1승 1무로 포항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후반 45분이 지났고, 승부는 그렇게 끝나는 듯 보였다.

“정말 그대로 끝날 줄 알았어요. 이제 수원과 챔피언 결정전이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후반 종료 직전에 프리킥을 내줬고, 울산에서는 (김)병지 형까지 올라오더라구요. 그래도 설마 골을 허용할 거란 생각까지는 안했죠. 그런데 병지 형에게 헤딩골을 내주고 말았어요.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덕분에 병지 형은 골 넣는 골키퍼라고 엄청나게 유명세를 탔죠. 해외 뉴스에까지 나오더라구요.(웃음)”

1승 1패가 된 포항과 울산은 대회 규정에 의해 곧바로 연장전에 이어 승부차기까지 벌였고, 막판 상승세를 탄 울산이 포항을 꺾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치열했던 신인왕 경쟁, 그리고 아쉬운 탈락

축구팬들을 전율케했던 1998년 플레이오프도 막을 내리고, 시상식의 계절이 왔다.
무엇보다 1998년 신인왕 경쟁은 그 치열함에 있어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안정환(33경기 출장, 13골-4도움), 이동국(24경기 출장, 11골-2도움), 박성배(32경기 출장, 12골-3도움), 정광민(35경기 출장, 11골-1도움), 하은철(21경기 출장, 7골-2도움) 등이 백승철(35경기 출장, 12골-3도움)의 경쟁상대였다.

득점랭킹 10위 안에 든 선수만 해도 안정환(3위), 백승철, 박성배(이상 4위), 이동국, 정광민(이상 8위) 등 5명에 이를 정도. K리그 새내기들의 활약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이동국이었다.

그러나 백승철은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며 신인왕을 놓친 아쉬움을 풀 수 있었다. 그 해 K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11명에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가치 있게 평가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표현은 안했지만 신인왕을 놓친 것은 솔직히 많이 아쉬웠어요. 물론 동국이나 정환이나 좋은 활약을 펼쳤고, 무엇보다 프로축구 활성화에 큰 공을 세웠죠. 그들이 있고 없고에 따라 관중 숫자가 수천명이 차이났으니까요. 그런 부분은 인정해요.”

“다만 팀에 대한 공헌도만큼은 제가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동국이만 해도 대표팀 차출이 많았죠. 그래서 조금 아쉬웠어요. 시상식 끝나고 기자분들이 말씀하시길 근소한 차로 떨어졌다고 하더라구요. 다행히 베스트11에 선정되어서 아픈 마음을 달랠 수 있었죠.”

불운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다.

1998년 최고의 한해를 보낸 백승철이었지만 1999년 시즌은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로 시작됐다.

호주 동계훈련에서 점프하다 떨어지며 발목을 다친 백승철은 그 후유증으로 상당 기간 고생해야 했고, 리그 초반 경기에서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6월에는 99 코리아컵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백승철은 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합류를 결심했다. 1998년 11월 중국과의 친선경기에 참가한 프로선발팀에 뽑히긴 했지만 정식 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고, 백승철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영예였던 것이다.

“코리아컵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박성화 감독님은 아프면 가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아무한테도 아픈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눈치채셨나봐요. 그런데 제가 괜찮다고, 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처음으로 대표팀에 뽑혔는데 어떻게 안갈 수가 있겠어요.”

“대표팀이란 것이 각 팀의 잘하는 선수들만 모인 곳이잖아요. 처음에는 기가 많이 죽었죠.(웃음) 그런데 발목이 계속 안좋았어요. 그렇지만 참았죠. 여기까지 왔는데 아프다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몸이 좋지 않다보니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죠.”

이렇게 다가온 부상의 악몽은 서서히 백승철의 몸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부상이란 녀석은 몸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퍼지기 마련.
몸의 한 부위에 이상이 오면 그 여파로 연쇄적으로 여기저기 부상이 찾아온다. 백승철이 바로 그 경우였다.

“한 곳이 완전하지 않다 보니까 체중을 실을 수가 없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반대쪽에 무리가 오더라구요. 거기에 경기 중에 점프하다가 대퇴부가 늘어나서 한동안 쉬었고, 결국 나중에는 무릎까지 무리가 왔어요.”

“무릎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부천전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슛을 성공시켜 1-0으로 이겼어요. 그런데 그 때 땅을 약간 차면서 슛이 됐거든요. 숙소에 왔는데 무릎이 조금 묵직하더라구요. 그래서 얼음을 대고 잔 뒤에 일어났는데, 무릎에 물이 차서 뒤로 넘어가지를 않았어요.”

“제 슛이 일반적인 슛과는 조금 달랐거든요. 말씀드렸듯이 슈팅 타이밍을 빨리 가져가기 위해서 허벅지를 사용하지 않고, 발목과 무릎만 사용했어요. 그것이 원인이 된 것 같아요.”

모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백승철은 1-2주 쉬고 보강훈련만 하면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와중에 포항은 1999년 정규리그 플레이오프 마지노선인 4위를 놓고 부산과 치열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팀 사정을 쉬면서 볼 수 없었던 백승철은 출전을 감행했다.

“무릎이 약간 찢어진 상태였지만 재활훈련을 하다보니까 괜찮은 것 같더라구요. 당시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출전하겠다고 했죠. 그렇게 8-9게임 정도를 뛰었는데, 아쉽게 팀은 5위로 탈락했어요.”

“그러고 나서 병원을 다시 찾았는데, 약간 찢어졌던 예전의 그 상태인 줄 알고 MRI도 찍지 않고 수술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무릎 전체에 문제가 있었어요. 인대와 십자인대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죠.”

“원래 수술대에 들어가서 상태가 심하면 큰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이야기했는데, 막상 수술대에 들어가니까 그 의사가 무슨 욕심이었는지 몰라도 수술을 강행하더라구요. 나중에 수술이 끝난 뒤에야 실수를 인정하더라구요. 그 때 큰 병원으로 갔어야 한다고...”

이렇게 백승철의 무릎은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것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삶 중 가장 끔찍했던 시절과 맞닥뜨려야 했다.

->3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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