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Total 276 articles, 19 pages/ current page is 14
   

 

  View Articles
Name  
   MUKTA 
File #1  
   hasj2.jpg (88.7 KB)   Download : 24
Subject  
   ②'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축구영웅"


2003년 2월 22일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기사...


94 미국월드컵의 악몽 이후 하석주는 1996년 7월 열렸던 아틀랜타 올림픽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무대를 향한 도전에 나섰다.

23세 이하로 구성된 올림픽대표팀의 비쇼베츠 감독은 올림픽 본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3명의 와일드카드로 황선홍, 이임생과 함께 하석주를 선발했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비쇼베츠 감독님이 지도를 했는데 그 때 저를 잘 보신 것 같아요. 사실 올림픽대표팀에 뽑히기 전에 감독님이 저를 뽑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나 봐요. 부산 대우 단장님께서 와일드카드로 너를 쓰려고 하는데 구단에서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이야기하셨죠.(웃음)"

결국 하석주는 올림픽대표팀에 차출되지 않고 소속팀 경기에 전념하게 됐다. 그러나 그 와중에 와일드 카드로 예상되었던 홍명보가 비쇼베츠 감독과의 불화로, 그리고 유상철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하석주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이 때가 올림픽을 1개월 앞둔 시점이고 프로리그 경기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구단에서도 하석주를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프로경기가 없는 상황에서 올림픽팀에 오라는 제의가 다시 왔어요. 이때는 구단에서도 뭐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제 의사를 물어보더군요. 저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결국 합류했어요. 딱 좋은 타이밍이었죠. 대회 한달 앞두고니까..(웃음) 비쇼베츠 감독님은 제가 유럽 스타일과 흡사하다고 많이 이야기하셨어요. 공간 침투가 빠르고 스피드, 지구력도 좋고 왼발을 잘 쓰는 성실한 선수라고 말씀하시며 같이 하고 싶은 선수라고 그러셨죠. 저를 그렇게 잘 봐주셨으니 고마웠습니다."

당시 한국과 같이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이웃 일본의 경우 와일드카드 3장을 쓰지 않고 올림픽 아시아 예선 멤버 그대로 출전했다. 아시아 예선때부터 함께 고생했던 선수들에 대한 배려, 와일드카드가 3명 들어오면서 생길 수 있는 팀웍의 균열 등이 그 이유였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생이나 선홍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성격적으로 어린 후배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서로 잘 맞고 친했죠. 그러나 아쉽게도 임생이와 선홍이 둘 다 대회 도중에 다쳐서 결국 세 경기를 모두 소화한 선수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안타까웠죠. 그 때도 8강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 이탈리아전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셨습니다."

첫 경기 가나전을 1-0으로 승리하며 상승세를 탔던 한국은 2차전 멕시코전에서 0-0으로 비겼다. 그리고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3차전에서 1-2로 패하며 다시 한번 예선 탈락의 분루를 씹어야 했다.

일부에서는 수비에 치중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전술적 미스였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윤정환과 최용수 등 몇몇 선수들의 역습으로 승부를 거는 비쇼베츠식 축구의 실패라는 의견이었다.

"비쇼베츠 감독님은 러시아 감독이다보니 파워있는 축구를 좋아했어요. 체격조건이 좋고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들을 선호했죠. 무엇보다 수비를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거의 모든 선수가 수비가담을 하고 서너명의 공격으로 역습을 노리는 그런 전술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수비축구라고 비판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사실 비쇼베츠 감독님의 수비 축구가 어느 정도는 주효했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전이 아쉽죠. 우리가 1승 1무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너무 수비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여론의 질타가 많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비쇼베츠 감독님에게는 부담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랬는지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포지션을 바꾸더라구요.  제가 항상 왼쪽 윙백 위치에서 뛰었는데 그 날은 저를 위로 올리고 (최)성용이를 아래로 배치시켰어요. 그것이 오히려 수비쪽에서 붕괴가 일어난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내가 윙백 위치에서 뛰는 것이 좋았을 뻔 했죠. 수비라인에서는 경험 많은 선수의 리드가 중요한데 말이죠."

이란전 참패로 기억되는 96아시안컵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마치고 K리그에 복귀한 하석주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12월에 열리는 아시안컵에 출전할 대표팀에 합류하는 등 빡빡한 스케줄에 시달려야 했다. 하석주 뿐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 모두에게 리그 종료 후 휴식시간도 없이 곧바로 출전하는 아시안컵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K리그 종료 후 소집된 대표팀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대표팀과 친선경기를 치른 뒤 UAE로 입성했다. 홈팀 UAE와의 개막전에서 1-1로 비긴 한국은 약체 인도네시아에게 4-2로 승리했으나 쿠웨이트에게 0-2로 패하면서 예선탈락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강행군으로 인한 체력적인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

간신히 예선탈락의 위기를 넘긴 한국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2-6으로 맥없이 무너지며 '한국축구의 몰락'이란 말까지 들어야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나 피곤했던 선수들의 상태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그 힘든 와중에도 하석주는 전게임에 출장하며 투지를 불살랐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번 2002월드컵의 경우에도 장마 때문에 앞당겨 치러져 유럽 시즌이 끝나고 선수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출전했잖아요. 그 선수들이 결국 파김치가 되어 도착했고 컨디션이 엉망이었어요. 자기들은 예전의 플레이를 보여주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어요."

"96아시안컵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장기 레이스를 마치고 쉬지도 못하고 그 먼 중동까지 날아가 경기를 한다는 것이 선수들의 집중력을 많이 떨어뜨렸습니다. 이기고 싶어도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를 않아요. 우리가 솔직히 이란한테 2-6으로 질 팀은 아니잖아요. 만약 이란이 그런 상태에서 극동 지역에서 경기를 했다면 우리가 6-2로 이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때는 다들 너무 지쳐있는 상태였어요."

패배의 충격 속에서 쓸쓸히 귀국하는 대표팀을 향해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김주성을 스위퍼로 기용하고 홍명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끌어올린 것이 패인이었다는 전술적 비판에서부터 박종환 감독의 선수장악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주성이 형을 스위퍼로 두고 명보를 올린 것이 패인이라는 말은 결과론에 불과해요. 그게 잘됐으면 아무 말도 없는데 잘못되니까 그런 말들이 나온거죠.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더군다나 이란전에서는 주성이 형이 미드필더로 뛰고, 명보가 스위퍼를 봤잖아요.  박종환 감독님은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처럼 선수의 심리 상태나 컨디션 파악을 잘하세요. 제가 지도받았던 감독님들 중에서 가장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강했던 분입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내고 귀국할 때면 항상 두렵죠.(웃음) 그래도 보통 선수 개개인에게 비판을 쏟아붓기보다는 감독에게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보다는 감독님들이 더 걱정이죠.(웃음) 또 원체 시끄러운 경우에는 아예 매스컴에 대해 관심을 끊고 잊어버려요.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거죠."

97 코리아컵과 차범근 감독

1997년에 들어오면서 하석주는 경이로울 정도의 왼발킥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왼발을 주특기로 사용하는 선수였지만 1997년 들어 그 정확성과 예리함이 더욱 증폭됐다. 97년 한해에만 A매치에서 3골, 8도움을 기록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3골 중 2골이 프리킥 골이었고 8도움 중 6개가 프리킥 또는 코너킥에 의한 도움이었다. 가히 '왼발킥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집트, 가나, 유고가 참가했던 97 코리아컵에서는 4도움을 모두 프리킥 또는 코너킥으로 얻어내며 대회 MVP까지 차지했다. 그러고 보면 하석주에게 있어 코리아컵(대통령배 대회)은 특별한 대회인 듯 싶다. 국가대표 데뷔무대였던 91년 대회에서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더니 97년 대회에서도 MVP와 도움왕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활약은 96아시안컵 참패 이후 박종환 감독을 대신해 새롭게 사령탑에 오른 차범근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내기에 충분했다.

"1997년은 차범근 감독님이 대표팀을 처음 맡은 해였죠. 노장 선수들을 대거 제외하고 어린 선수들을 많이 중용하셨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아시안컵 참패 이후 여러 가지로 힘들었기 때문에 대표팀을 그만둘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차 감독님과의 면담을 통해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죠."

"차 감독님은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특이한 감독님이셨어요.(웃음) 스스로 운동장도 같이 뛰고,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셨죠. 고지식한 면도 있긴 하지만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10년 넘게 활약한 분답게 연구하는 자세가 남다르고 한국축구를 위해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런 분이셨어요. 그 덕분인지 선수들도 의욕이 대단했죠."

98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997년 2월에 열렸던 98월드컵 아시아 1차 예선 태국, 홍콩과의 홈 & 어웨이 경기에서  3승 1무를 기록하며 최종예선에 진출한 한국은 최종 예선에서 일본, UAE,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B조에 포함됐다.

5개국씩 2개조로 나눈 최종예선 역시 홈 & 어웨이로 진행됐으며 각조 1위팀이 월드컵행 티켓을 거머쥐며 2위팀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이긴 팀은 월드컵 티켓을, 진 팀은 오세아니아 지역 대표와 또다시 플레이오프를 갖는 방식이었다.

앞에서 밝혔듯이 97년 들어 날카로운 왼발을 무기로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하석주는 최종 예선에서도 전경기를 출장하며 차범근 감독의 신임이 대단함을 보여줬다. 최종예선 8경기에서 2골, 3도움의 맹활약. 그 중에서도 일본과의 도쿄 원정경기, 일명 '도쿄대첩'이라고 불리웠던 경기는 98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의 백미였다.

이 경기에서 하석주는 비록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쉴 새 없이 측면 오버래핑과 날카로운 크로스를 시도하며 왼쪽 라인을 지배했다.

"도쿄 원정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는 정말 기분 최고였죠. 적지에서 2-1로 역전승을 거뒀고, 저 역시 컨디션이 최고였어요. 개인적으로는 제가 결승골을 기록했던 2000년 한일전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한일전이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도 월드컵 붐이 엄청나게 일어났죠.(웃음) 그 경기를 승리함으로 해서 월드컵 본선행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2경기나 남긴 상태에서 본선행을 확정지었죠."

"잠실에서 열렸던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일본전에서 0-2로 졌을 때는 봐줬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왔어요. 경기에서 봐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상대가 일본인 경우에는 정말 말도 안되죠. 다만 우리는 이미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태인 만큼 정신적으로 조금 해이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일본은 우리에게 무조건 이겨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죠. 그 차이가 결국 승패에 직결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교차- 98월드컵 멕시코전 프리킥 골과 퇴장

98 프랑스월드컵은 한국으로서도, 그리고 하석주에게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것이다. 아시아 예선에서의 좋은 성적은 국민들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월드컵 1승과 16강을..'이란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염원을 담고 프랑스로 건너간 대표팀에게 돌아온 결과는 1무 2패, 2득점에 9실점이라는 참담한 결과뿐이었다.

그리고 94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 결정적인 득점기회를 놓치고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 하석주는 98월드컵 멕시코전에서 똑같은, 아니 훨씬 고통스런 순간을 맛봐야 했다.

멕시코전에서 전반 28분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하석주는 한국축구의 구세주였다. 그러나 골을 넣은지 2분 뒤 백태클로 인해 퇴장을 당하면서, 그리고 이후 3골을 내리 허용하며 1-3으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하석주는 패배의 주범으로 몰리며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월드컵에 항상 나갈 때마다 월드컵 1승과 16강이 지상과제였는데 98월드컵에는 의외로 부담 없이 자신감있게 나갔어요. 멕시코전에서도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선수들 몸놀림도 좋았죠. 전반 28분에 프리킥 찬스가 났는데 거리가 조금 멀었어요. 그 전까지 가까운 거리에서는 제가 많이 차고 먼 거리에서는 슈팅력이 있는 (유)상철이가 차는게 일반적이었죠."

"그 때도 처음에는 상철이가 차려고 했는데 뒤에서 보니까 수비벽 사이로 약간의 빈 공간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상철이에게 가서 '내가 찰께'라고 그랬더니 상철이도 '예. 그렇게 하세요'라고 하더라구요. 조금 먼 거리였기 때문에 달려가면서 약간 세게 찬다고 찼는데 그것이 멕시코 수비 머리 맞고 굴절되면서 들어갔어요. 정말 짜릿했던 순간이죠."

그러나 첫 골의 감격으로 전 국민이 환호하고 있었던 그 순간, 불행의 씨앗은 잉태되고 있었다. 의외의 일격을 당한 멕시코는 만회골을 위해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한국의 왼쪽 측면에 공이 전달된 순간, 하석주의 백태클이 멕시코 선수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다소 과격하긴 했으나 경고 정도를 줄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주심은 퇴장을 명령했다.

"사람들은 제가 골 넣고 흥분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그렇게 흥분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선제골도 넣고 했으니 더 열심히 뛰어서 1승을 올리겠다라는 의욕이 강했을 뿐이죠. 제가 그 선수를 해꼬지하려고 고의로 들어간 것도 아니어서 경고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퇴장을 주니까 놀랐죠. 태클 들어갈 때 '아차'하는 느낌도 없었구요. 단지 공을 뺏으려고 들어갔던 것이니까요."

"당시 백태클에 대해서 선수들이 그렇게 크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FIFA에서 준 비디오로 교육을 받은 정도밖에 없었어요. 월드컵 전에 백태클에 대한 조치를 강화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우리 경기보다 앞선 경기들을 보면 제 태클보다 심한 태클도 퇴장을 주진 않았어요. 심판들도 백태클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들리는 이야기로는 앞선 경기들에서 퇴장당할 상황이 많았는데 왜 주지 않았느냐는 FIFA 내부의 이야기가 있었고 내가 그 희생양이라는 말도 있었죠."

"어쨌거나 내가 비슷하게라도 했으니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는데 퇴장까지 준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퇴장명령을 받고 그라운드에서 나온 하석주는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야 했다. 10:11로 맞선 한국은 하석주의 빈 공간을 막기 위해 열심히 뛰었으나 역부족이었고 후반에만 3골을 내주며 무너지고 말았다.

"퇴장당해서 벤치에도 앉지 못하니 지하에 있는 라커룸으로 갔죠. 그런데 거기에는 TV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그 상태에서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데 전반이 끝나고 감독님과 선수들이 들어와서 괜찮다고 위로를 하더군요. 후반이 되고 라커룸에서 혼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큰 함성소리가 3번 들리더라구요."

"TV가 없으니까 정말 답답하고 온갖 생각이 다 들었죠. 제가 퇴장당했으니까 우리가 3골 넣었을리는 없고, 2-2가 됐거나 1-3으로 졌거나 둘 중 하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1-3으로 졌다고 하더라구요."

네덜란드전 0-5완패와 차범근 감독의 경질

멕시코전에서의 퇴장으로 하석주는 1게임 출전정지 징계를 당했다. 1차전 패배로 인해 팀 분위기는 많이 침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대회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인 네덜란드를 상대로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0-5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저와 선홍이가 벤치에서 경기를 보는데 0-5까지 되니까 너무 힘들고 괴롭더군요. 내가 팀 흐름을 망쳐놨다는 죄책감도 많이 들고...네덜란드전이 끝나고 팀 분위기는 더욱 침체됐죠. 거기에 감독님까지 경질됐구요."

"감독님이 경질됐을 때 그게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됐어요. 내가 퇴장당한 것이 모든 잘못된 상황의 시발점이었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어요. 저를 욕한 사람도 많았고 격려해준 사람도 많았고..아마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머리가 깨지더라도 한번 해보자- 벨기에와의 3차전

결국 네덜란드전 이후 차범근 감독은 경질됐고 벨기에와의 3차전은 김평석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다. 선수들은 이대로 3패를 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오기로 벨기에에 맞섰고, 하석주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다.

"네덜란드전 참패 이후 여론이 시끄럽고, 팀 분위기도 극도로 침체되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벨기에전도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축구협회에서 했겠죠. 감독 없이 벨기에전을 맞이한 김평석 코치도 그렇고, 선수들도 그렇고 다 똑같은 마음이었어요.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머리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선수들의 이런 투지 덕분이었을까. 전반 7분만에 상대에게 선제골을 내줬음에도 끈기있게 따라붙었고 후반 27분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며 1-1로 경기를 마쳤다. 하석주 본인으로서도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사실 기록상으로만 봤을 때 하석주는 2경기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98월드컵에서 한국이 뽑아낸 2골에 모두 관여하는 활약을 펼친 셈이었다.

"사실 벨기에전 끝나고 나오면서 아쉬움도 있었어요. 선수들도 열심히 했고 이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몇 차례 득점기회가 불발이 되어서 그렇지...벨기에는 우리에게 무조건 이겨야 16강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밀고 올라왔고 우리는 그것을 이용한 역습으로 찬스를 잡았죠."

"비긴 것이 너무나도 아쉽지만 선수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머리가 터져 붕대를 감고 경기를 뛴 선수도 있고, 다리에 경련이 일어남음에도 끝까지 뛴 선수도 있고..정말 처절했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져요. 그것이 국민들이 바라는 거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해주는 모습...그거 하나로 많이 만회가 됐죠."

하석주의 이 말은 역설적으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국민에게 갖는 부담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준다. 우리 국민들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그렇게 해줬다고 이런 부담감 속에서 머리가 깨지도록, 다리에 경련이 나도록 뛰고 또 뛰어야 할까.

물론 선수들이 단지 국민들을 위해서만 이렇게 투혼을 불사르며 뛰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국민에 대한 중압감, 그리고 귀국했을 때 국민들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효창운동장에서 50명도 되지 않는 관중 속에서 그들만의 경기를 가질 때도, 명색이 프로리그임에도 텅빈 관중석을 보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칠 때도 아무도 그들을 성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대회만 되면 온 국민의 관심이 이들에게 집중되었고 온갖 비난의 목소리 역시 집중되었다. 그 결과에 따라 영웅으로 추앙되기도 하고, 역적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벨기에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은 정말 처절했다. 그들은 온 몸을 부딪쳐가며 경기에 임했다. 어쩌면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런 모습에 한국인 중 박수를 쳐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볼 때 벨기에전에서의 한국축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축구는 아니었다.

그날 보여준 한국축구는 깔끔하고 세련된 공수연결과 완급조절 및 패싱, 효과적인 위치선정과 압박, 여기에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량이 뒷받침된, 완성된 의미의 축구가 아니라 선수 하나 하나가 온 몸으로 덤벼든 축구였을 뿐이다. 그들의 투혼에 박수를 보냈지만 냉정한 의미에서 벨기에전에서의 축구는 앞으로 한국축구가 지향해야할 축구가 아닌, 지양해야할 축구인 것이다.

하석주 본인도 그런 부분에 대해 인정을 한다.

"그렇죠. 정신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죠. 기술도 앞서야 하고 여러 가지 축구 환경이나 수준도 끌어올려야 하고...아마 그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거에요."

3편에 계속...

-- MUKTA 상헌 --


    

 




81
 <박영수 칼럼> "GK교육의 핵심은 정확한 기본기"

MUKTA
2004/09/04 1517
80
 ③'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

MUKTA
2004/08/30 1407

 ②'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

MUKTA
2004/08/30 1365
78
 ①'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

MUKTA
2004/08/30 1370
77
 <윤덕여 칼럼> "러시아 친선대회를 결산하며"

MUKTA
2004/08/30 967
76
 ②강신우 유소년분과위원장, "체계화된 유소년 데이터 ...

MUKTA
2004/08/30 929
75
 ①강신우 유소년분과위원장, "체계화된 유소년 데이터 ...

MUKTA
2004/08/30 1390
74
 네덜란드 연수 다녀온 임종헌 감독, "자발적이고 즐거...

MUKTA
2004/08/30 1944
73
 신태용, "참가하는 모든 대회 우승이 2003년 목표"③

MUKTA
2004/08/25 859
72
 신태용, "한국축구의 뿌리는 K리그"②

MUKTA
2004/08/25 1070
71
 신태용, "명실상부한 K리그 최고의 선수"①

MUKTA
2004/08/25 1234
70
 스카이콤 노제호 사장, "유럽 진출, 단순 이적이 아...

MUKTA
2004/08/25 2952
69
 <주무 이야기>② 이해두 차장(4), "여자대표팀과 U...

MUKTA
2004/08/25 1179
68
 <주무 이야기>② 이해두 차장(3), "잊을 수 없는 9...

MUKTA
2004/08/25 1125
67
 <주무 이야기>② 이해두 차장(2), "월드컵 본선준...

MUKTA
2004/08/25 1156
[1]..[11][12][13] 14 [15][16][17][18][19]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Headv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