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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축구영웅"


2003년 2월 21일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기사..


2002년 11월 20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90년대 한국축구를 이끌었던 '거목' 홍명보와 황선홍은 화려하게 대표팀 은퇴식을 치렀다.

한국 축구팬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두 스타의 대표팀 은퇴를 아쉬워했고 두 선수도 눈시울을 붉히며 팬들에게 화답했다.

대표팀 후배들 역시 두 선배를 무동 태우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며 아낌없는 존경을 표시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명보, 황선홍이 축구팬과 매스컴의 관심 속에 성대하게 대표팀 은퇴식을 치른 것과 달리 소리소문없이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고 코치로서 새롭게 삶을 시작한 축구 스타가 한 명 있다. '왼발의 달인' 하석주(35)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A매치 통산 94회 출장에 22골을 기록했으며, 94 월드컵과 96아시안컵 및 아틀란타 올림픽, 98 월드컵, 2000 아시안컵 등 90년대 중반 이후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던 하석주 역시 축구팬과 매스컴의 찬사를 받으며 은퇴했어야 할 한국축구의 역사이다.

특히 A매치 통산 94회 출장은 홍명보(135회), 차범근(121회), 황선홍, 유상철(이상 103회)에 이어 공동 5위(최순호도 94회)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A매치 22골 역시 차범근(55골), 황선홍(50골), 최순호, 허정무(이상 30골), 최용수(27골)에 이어 6위에 해당하는 대단한 기록.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축구계와 축구팬, 매스컴이 그들의 축구 영웅들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은퇴소감을 밝히는 하석주 본인도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제가 현역으로 25년 동안 공을 찼고 그 중 프로에서 13년, 대표팀에서 11년을 뛰었어요.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고, 저 역시 91년에 처음 대표팀에 뽑힌 이래 화려하고 좋았던 시절 다 지나고 어느덧 은퇴까지 하게 됐네요. 사실 은퇴할 무렵이 되니까 뭔가 씁쓸한 맛도 있고 아쉬움도 있고 그래요. 외국의 경우를 보면 은퇴식도 정말 멋있게 해주고 모두의 축복 속에서 은퇴를 하잖아요.  선홍이나 명보 경우도 그렇게 했고요.  저 역시 한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시절도 있지만 이렇게 잊혀지면서 은퇴한다는 것이 씁쓸하네요."

사실 소속팀 포항에서는 하석주의 은퇴를 만류했다. 선수로 1-2년 정도는 충분히 더 뛸 수 있는 여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석주 역시 그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축구선수로서 25년 동안 생활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고,그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던 것이 주위의 만류에도 은퇴를 결심한 이유였다.

"사실 당장 지도자로 나서기보다는 1년 정도 공백기간을 갖고 공부도 하고, 선진축구 견학도 하고, 국내 프로구단들도 지켜보면서 축구현실을 좀 더 알고 싶었는데 너무 빠르게 코치 제의가 와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한달여 동안 고민하다가 수락했죠. 충전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코치직을 맡게 됐기 때문에 준비과정이 조금 부족하긴 해요.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아마추어 시절

하석주가 처음 축구부에 들어갔던 시기는 서울 성곡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꼬마 시절부터 워낙 축구를 좋아했고 잘했던 그이기에 축구부를 창단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들어갔다. 그러나 축구부 생활을 시작한지 몇 개월만에 팀이 해체됐고, 하석주는 숭곡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축구를 계속하게 됐다.

그러나 아마추어 시절의 하석주는 다른 스타급 선수들에 비해 그렇게 두각을 나타낸 편은 아니었다.

"왼발잡이라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발 밖에 몰랐고 왼쪽 측면이 줄곧 제 위치였어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때까지 계속 왼쪽 윙을 봤죠. 초등학교때 대회 2관왕도 하고 서울시 대표도 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어요. 조그마한 체구였지만 육상을 했었기 때문에 순발력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들어가서는 가능성만 있었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죠.  광운공고 졸업하고 아주대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몸에 힘이 좀 붙었어요.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대학선수권 MVP도 차지하고 대학선발팀에도 뽑히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죠."

1990년 부산 대우에 입단하다

아주대 시절부터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하석주는 1990년 부산 대우(현 부산 아이콘스)에 연고지명으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는 정용환, 김주성, 정해원, 이태호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하석주는 프로생활의 시작을 벤치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90년에 입단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서울에서 줄곧 살다가 부산으로 가니 친구도 없고, 팀에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해 출장기회도 적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외롭고 마음을 잡지 못해 서울 친구들에게 내려오라고 해서 술 마시고 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노는 것은 나중에 놀더라도 먼저 내 자리를 찾자'고 마음을 먹었죠. 뭐 그 이후에도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던가 그런 날에는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가에서 맥주 1-2캔 정도 마시고 그러긴 했지만 말이죠.(웃음)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부산 대우에 입단한 뒤 처음 2개월 정도 벤치생활을 했던 하석주는 빠르게 팀에 적응, 점차 출장시간을 늘려갔다. 김종부와 정해원, 이태호 등의 백업멤버로 출발했으나 어느덧 김종부를 제치고 주전으로 투입된 것. 포지션도 지금까지 줄곧 뛰어왔던 왼쪽 윙이 아닌 스트라이커로 재배치됐다.

이후 부동의 주전으로 자리를 굳힌 하석주는 스트라이커에서 다시 왼쪽 윙, 윙백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98년 상반기까지 부산 대우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42골, 20도움을 기록하며 1991년 정규리그 우승과 1997년 사상 초유의 시즌 3관왕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97년 부산은 아디다스컵, 정규리그, 프로 스펙스컵을 모두 우승하며 천하통일을 이뤘다.)

"부산에서 91년 정규리그 우승과 97년 3관왕을 경험했는데, 아무래도 97년이 더 감격적이죠. 일단 팀이 3관왕을 차지하며 최강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제 자신도 91년보다는 97년에 훨씬 좋은 활약을 펼쳤거든요. 좋은 시절이었죠.(웃음) 특히 97년 아디다스컵 결승전에서 우리가 4-1로 이겼는데 제가 2골, 1도움을 기록했어요. 2골 모두 수비수 3명 정도를 제치고 넣은 환상적인 골들이었죠. 제가 프로리그에서 기록했던 골들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골들입니다."

국가대표 첫 데뷔

하석주가 국가대표에 처음 데뷔했던 것은 1991년 6월에 열렸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지금의 코리아컵)를 통해서였다.

부산에서의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대표팀에 합류한 하석주는 첫 경기인 인도네시아전에서 교체로 출전, 대표팀 데뷔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경기는 인도네시아 A팀이 아닌 관계로 공식 A매치에서 제외됐고, 하석주의 실질적인 A매치 데뷔는 다음 경기인 몰타전이었다.

몰타전에서도 하석주는 골을 기록하며 A매치 데뷔경기에서 득점을 올리는 기쁨을 맛봤다. 전 경기인 인도네시아전 골을 포함하면 2게임 연속골. 대표팀에 첫 데뷔한 신예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출발을 보인 셈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승세는 대회 기간 내내 이어지며 대회 MVP와 득점왕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전 이집트와의 경기에서 2 : 0으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하석주는 두 골을 모두 넣어 일약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 때가 저로서는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된 것이잖아요. 어린 나이였고 좋은 선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면 다음 대표팀에서는 제외된다라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 첫 경기부터 당시 고재욱 감독님이 기회를 주셨고 운 좋게 골을 기록하면서 상승세를 탔죠. 어린 선수가 한번 탄력 받으면 겁날 것 없이 무섭게 하잖아요.(웃음) 대표팀 막내가 대회 MVP와 득점왕까지 차지하니까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더라구요.(웃음)"

A매치 6게임 연속골과 드라마틱했던 94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4 미국월드컵을 향한 아시아 예선은 1993년 5월부터 시작됐다. 한국 대표팀은 김호 감독을 사령탑으로 86월드컵 이래 3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노리고 있었다.

1차 예선에서 바레인, 레바논, 홍콩, 인도와 함께 D조에 속한 한국은 레바논 베이루트와 서울에서 각각 2차례씩, 총 8경기를 가졌다.  이 예선에서 하석주는 두번째 경기였던 레바논전 결승골을 시작으로 6게임 연속골을 뽑아내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국내 선수 A매치 최다 연속골로 남아있다.

"정말 골이 잘 들어갔죠.(웃음) 6게임 연속골이라고 언론에서 많이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 저한테는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어요. 무엇보다 김호 감독님 체제에서 게임을 뛸 수 있다는 것, 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더 만족스러웠죠. 뭐 아직까지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남아있다니 기분은 좋습니다.(웃음) 나란 사람은 정말 한국축구사에 여러 가지 기록을 남기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월드컵에서 골 넣고 퇴장당한 선수도 제가 유일하잖아요.(웃음)"

아시아 1차예선을 가볍게 통과한 한국은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최종예선을 갖게 됐다. 그러나 1차예선에서 6게임 연속골을 뽑아내며 최고조의 컨디션을 유지하던 하석주는 왼쪽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며 대표팀 합류가 불투명해졌다. 당시 하석주를 비롯해 정재권, 강철 이 세 선수의 부상이 심각했고 언론에서는 대체 선수를 선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 김호 감독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1차 예선에서 공헌도가 가장 큰 사람이 너였고 최종예선에도 꼭 데려가고 싶은데 주변에서 네 부상이 심각하니까 제외하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께 정말 가고 싶다, 가서 1경기라도 뛸 수 있으니까 제발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가게 됐어요. 막상 카타르에 갔더니 시합 1주일 남겨두고 제 컨디션이 제일 좋더라구요.(웃음) 바로 선발 멤버에 뽑혀 첫 경기 이란전에서 1골 뽑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무릎 통증이 오더군요. 첫 경기에서 90분 소화한 뒤 2경기를 후반 교체멤버로 뛰었고 일본전을 풀타임으로 뛴 다음 마지막 북한전에서는 후반 교체로 들어가 1골을 넣었죠. 무릎이 너무 아파 전게임을 뛸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란전을 3-0으로 깔끔하게 승리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듯 했던 한국은 이길 수 있었던 경기인 이라크, 사우디전에서 뒷심부족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암운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일본전에서의 0-1패배는 한국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일본에게 0-1로 질 때는 정말이지 우리가 탈락하고 일본이 무조건 올라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일본팀과 같은 호텔을 썼는데 일본애들은 우리에게 이기고 나서 여자친구들도 데려오고 로비에서 인터뷰하고 난리더군요.(웃음) 우리는 밥만 먹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죠. 한마디로 악몽이었어요."

그러나 축구의 신은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최종경기에서 북한을 3-0으로 이긴 한국은 일본이 후반 인저리타임에 동점골을 내주며 2-2로 비김에 따라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행에 성공했다.

"당시 일본에 지고난뒤 국내 분위기는 '이대로 한국에 들어오면 다 죽을 줄 알아라,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라는 분위기였어요. 북한과 경기할때 우리가 이기고 있긴 했지만 일본도 이라크한테 이기고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경기가 1분 정도 먼저 끝났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벤치에서 일본이 비겼다고 그러지 않겠어요. 고개 숙이고 있던 선수들은 난리가 나고...(웃음) 정말 그런 극적인 경우는 아마 다시는 없을 겁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단 전원이 호텔 1층부터 10층까지 노래부르고 기차놀이하면서 밤새 놀았죠. 일본애들은 어디 갔는지 다 숨어버리고...(웃음)"

악몽이었던 94 미국월드컵

하석주에게 있어 월드컵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대회일 것이다. 94월드컵과 98월드컵 두 차례 월드컵을 통해 하석주는 결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94월드컵은 그 악몽의 시작이었고 그 무대는 바로 볼리비아와의 2차전이었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김)주성이 형이 합류하면서 저는 교체로 많이 뛰는 상황이었어요.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도 후반 27분에 교체투입됐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죠. 후반 40분에 제가 파울을 얻어서 결국 홍명보가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거든요. 문제는 볼리비아와의 경기였어요. 그 경기에서도 저는 후반 20분에 교체로 들어갔죠."

"후반 끝나기 직전에 저에게 결정적인 찬스가 왔어요. 황선홍이 저에게 힐패스를 해줬고 골키퍼와 1:1로 맞서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못 넣었어요. 그것만 넣었으면 16강인데...선배들이 아파트 한채 날아갔다고 그러기도 하고..(웃음) 너무나도 아쉬웠던 순간이죠. 슛 당시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꼭 골을 넣어야 한다는 마음에 너무 힘이 들어가 순간적으로 모든 리듬과 흐름을 다 잃어버린거죠. 월드컵 1승, 16강에 대한 부담이 컸는지, 큰 게임도 많이 뛰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긴장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월드컵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항상 따라다녔던 문제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팀들과의 경기경험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오는 선수들의 자신감 부족과 월드컵 1승, 16강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은 선수들에게 번번이 좌절을 안겨줬다. 그리고 하석주 역시 볼리비아전에서의 이 뼈아픈 실수로 인해 마음고생을 톡톡히 해야했다.

"사실 그때 미국 날씨가 워낙 더웠기 때문에 다른 팀들이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했죠. 우리가 오히려 더 힘을 냈고. 더운 곳에서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싶었고 실제로 유리했어요. 월드컵 16강과 1승을 달성할 수 있는 큰 기회였는데 오히려 16강과 1승에 대한 부담감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었죠. 만약 그 이전 월드컵에서 16강에도 들고 1승도 했더라면 쉽게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부담감 때문에 결국 또다시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특히나 월드컵에만 나가면 마음 고생을 했어요.(웃음) 결국 볼리비아전 끝나고 김호 감독님께 찾아가서 독일전에는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볼리비아전 그 상황이 계속 머리에 떠오르고 자신감은 완전히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국내에 돌아온 뒤에도 한 동안 그 상황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어요.  주위  사람들도 '야, 그 때 네가 골을 넣었으면 완전히 영웅됐을텐데..'라고 이야기를 하고 말이죠."

이 때의 마음고생으로 인해 한 동안 고전했던 하석주는 심기일전, 왼쪽날개로서 활발한 움직임을 되찾았다. 그리고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뽑히며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한 도전에 나섰다.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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