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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최성국, "마술적인 드리블을 바탕으로 세계무대에 도전"


2003년 3월 26일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기사..


최성국(20, 울산)을 지금 이 시점에 <한국축구 유망주> 코너에 소개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축구전문가, 그리고 아마추어 축구에 관심이 많은 일부 축구팬들 사이에서만 '가능성 있는 유망주'로 칭송 받았던 최성국은 어느새 모든 축구팬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선수로 성장했고 국가대표팀에까지 이름을 올리는 스타가 되었다.

170cm의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단단한 상하체 근육은 작은 탱크를 연상시키게 하며, 무엇보다 수비 2-3명을 순식간에 제치는 폭발적인 드리블은 최성국의 최대 장점이다.

빠르면서도 폭을 좁힌 스텝과 발목만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공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그만의 드리블링은 수비수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국내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으로 공인 받고 있는 상태.

최성국의 이와 같은 특징은 1980년대 전세계 축구팬을 사로잡았던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의 느낌과도 비슷한 것이어서 흔히 '리틀 마라도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이는 아직 20세. 지금까지 최성국이 보여준 플레이는 그의 일부에 불과하다. 최성국은 분명 성장단계에 있으며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보다 앞으로 보여줘야 할 부분이 훨씬 많은 선수이다.

다른 선수에 비해 다소 늦게 축구에 입문

최성국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말이었던 1994년이었다. 일반적으로 축구를 시작하는 시기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 것을 감안할 때 다소 늦게 축구에 입문한 셈이다.

"원래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하고 싶은 마음도 많아서 혼자 운동하고 그랬었죠. 그런 모습을 선생님이 보시더니 테스트를 받으러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셨어요. 그래서 받으러 갔는데 성과가 좋았고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죠."

동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역곡중에 입학한 최성국은 본격적으로 축구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안에 실력이 일취월장한 최성국은 축구를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인 1996년 U-14 대표팀 상비군에 선발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이미 최성국에게는 '리틀 마라도나'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마라도나와 스타일이 비슷하다라는 말을 듣곤 했어요. 2년만에 대표팀에 뽑히긴 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다만 운동이 힘들어서 하기 싫다라는 마음보다는 남들보다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뿐이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요..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정명고 시절

어린 시절부터 축구선수로서는 작은 체구로 인해 남모를 고충을 겪었던 최성국은 역곡중을 졸업하고 부천의 정명고에 입학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능동적인 성격의 최성국은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있기보다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힘썼다.

팀훈련이 끝난 후에도 밤 11시, 12시까지 개인훈련을 하며 개인기를 연마했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큰 선수와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의 우상인 마라도나의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며 드리블을 연구하는 등 그의 고교시절은 그 누구보다 엄청난 땀을 흘렸던 시기이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까지 제 신체조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긴 했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부딪쳐보고 경험해보니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큰 선수가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있다면, 작은 선수가 할 수 있는 플레이도 있는 것이니까 충분히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신체조건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정명고에 각종 해외경기 비디오가 있었어요. 마라도나를 엄청나게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비디오를 보면서 연구를 많이 했죠. '이렇게 치고 나가면 어떻게 제쳐지는가' 이런 부분을 많이 분석했어요. 그 밖에 브라질 리그 경기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의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나름대로 연구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최성국에게 있어 고교생활은 재미있는 추억거리이다. 1학년 시절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최성국은 2학년부터 팀의 주축선수로 자리잡았고 3학년 때는 진주 MBC배에서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최성국 본인으로서는 처음 받는 큰상이어서 더욱 감격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정명고에서는 여러 가지 추억이 많이 있었죠. 고교 때는 정말 운동만 열심히 했고, 애들 역시 하나같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서로서로 도와가며 창단 첫 우승도 했고 말이죠. 힘든 것도 많았지만 추억도 많았고 재미있었어요. 고교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들곤 해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역시 나체로 운동장을 돌았던 일이죠.(웃음) 박이천 감독 선생님이 상당히 무서우신 분이거든요. 1학년 때 금강대기에서 예선탈락하고 감독님이 화가 나셨나봐요. 일단 외출을 주셨고 외출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했는데 엔트리 20명만 남고 집에 가라고 하시더라구요. 밥을 먹고 감독님이 큰방에 2열로 양반다리하고 앉으라고 하시더니 명상을 하라고 하셨어요. 30분 동안 불을 끄고 명상을 했는데 다리 아프고 그랬죠.(웃음)"

"그러고 나서 감독님이 불을 켜시더니 팬티만 입고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어요. 우리 학교가 남녀공학이었고 옆에는 여상도 붙어있었거든요. 그리고는 팬티까지 벗으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운동장도 같이 쓰는데 팬티를 어떻게 벗어요.(웃음) 그래도 할 수 없이 벗었죠.(웃음) 정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운동화까지 벗은 완전 나체로 운동장을 뛰었죠."

"다행히 그 때가 토요일이라 대부분 집에 갔고, 3학년 누나들만 봤을 거예요.(웃음) 저는 1학년이라 그런지 별로 창피하지는 않았죠.(웃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에요. 언제 그렇게 해보겠어요.(웃음)"

청소년대표팀에서의 계속된 불운

한편 정명고 시절 최성국은 각급 연령별 대표팀에 뽑히며 본격적으로 국제대회를 경험하게 됐으나 불운하게도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최성국이 처음으로 경험한 국제대회는 1998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 8회 U-16 아시아선수권이었다.

U-14대표팀 상비군에 처음 뽑힌 지 2년 뒤인 정명고 1학년 시절, U-16 대표팀에 뽑혀 이 대회에 참가한 최성국은 중동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쉽지 않은 첫 국제대회를 경험하게 됐다. 당시 B조에 속한 한국은 일본과 오만, 방글라데시를 연파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나 바레인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3-4로 역전패하며 조 2위로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강에서도 홈팀 카타르에게 1-2로 분패하며 결국 세계대회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이 대회에서 최성국은 5게임에서 모두 후반 교체 투입되어 조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오만전 결승골과 4강 카타르전에서의 만회골 등 2골을 뽑아내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당시 대표팀에는 주광윤, 김두현, 김영광, 김동진, 김영삼, 한정화 등의 쟁쟁한 멤버가 포진해 있었고, 대표팀 감독이었던 기영옥 감독(광양제철고)은 더운 중동지역에서의 경기임을 감안해 스피드가 좋고 드리블이 탁월한 최성국을 후반에 조커로 투입하는 작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물론 감독의 전술적인 선택이었지만 최성국 본인으로서는 후반교체멤버로 활용되는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맞이하는 국제대회였어요. 어찌 보면 당시 기영옥 감독 선생님의 경기스타일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죠. 감독님은 제가 선발로 출장하기보다는 후반에 들어가 상대를 휘젓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셨어요. 선발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음고생을 하고 그렇진 않았어요. 오히려 후반에 투입되어 결승골도 넣는 등 2골을 기록했으니까요."

"당시를 회상해보면 오만과의 예선 2차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일단 제가 결승골을 넣고 이겨 경기 MVP까지 받기도 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경기 중간에 골키퍼 (김)영광이가 다쳤거든요. 기절해서 실려나갔는데 선수교체를 전부 했기 때문에 (김)동진이가 골키퍼를 봤었어요.(웃음) 다행히 실점을 허용하지 않고 경기가 끝났죠. 다만 경기 끝나고 항상 게임 MVP를 시상하고 그랬는데 영광이가 다치는 바람에 아무 행사도 없어서 서운했었어요."

첫 국제대회에서 아쉬움을 맛봤던 최성국은 정명고 3학년 시절이었던 2000년에 U-19 대표팀에 뽑혀 제 32회 U-19 아시아선수권 9조 예선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이천수, 최태욱 등 1981년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1983년생인 최성국이 포함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대표팀에는 최성국만이 유일한 83년생이었으며 82년생도 박병규, 김동진, 주광윤 등 3명에 불과했었다.

팀의 막내임에도 9조 예선에서 최성국은 4경기 중 2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비록 상대가 한 수 아래인 필리핀, 마카오였지만 최성국은 경기마다 2골씩, 모두 4골을 뽑아내는 활약으로 조영증 감독(당시 U-19 대표팀 감독)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순탄하게 대표팀 생활을 할 것으로 보여지던 최성국은 뜻하지 않은 암초에 걸리며 U-19 아시아선수권 본선 출전이 좌절됐다. 9조 예선을 치른 뒤 학교에 돌아온 그에게 많은 축구선수들을 괴롭혔던 피로골절이 찾아온 것이다. 최성국은 결국 TV로만 아시아선수권을 지켜봐야 했고 대표팀은 조 예선에서 탈락, 세계대회 진출권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6월말에 말레이시아에서 예선을 치르고 돌아와서 7월에 백록기에 참가했는데 다리가 아프더라구요. 결국 경기에서 뛰다가 이상이 생겼어요. 사실 2학년 무렵부터 급격한 턴을 할 때면 통증이 있긴 했었는데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거든요. 결국 연말까지 휴식과 재활훈련에만 치중했고 아시아선수권도 TV로 볼 수밖에 없었고...아쉬움이야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프로행 유혹을 물리치고 고려대에 진학

정명고를 졸업할 무렵 이미 최성국은 프로와 대학팀들의 스카웃 우선 순위에 올라있었고, 고심 끝에 최성국이 내린 결정은 고려대행이었다. 이 해에 고려대는 김정우, 박병규, 주광윤, 김영삼 등 고교랭킹 상위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최성국 역시 이들과 함께 '슈퍼루키 5인방'으로 불리우며 대학축구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사실 대학행을 결정한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 최성국은 축구를 포기할까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집안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천SK가 연고라 그 쪽으로 기울어졌었어요. 저 역시 프로욕심이 나긴 했지만 부천으로 가기는 싫었고 아버지 역시 돈 조금 더 받는 것보다는 아직까지 대학 나오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죠."

"사실 고교 시절 제 뒷바라지 때문에 가족들이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었어요. 내가 축구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죠. 그런 시기에 아버지와 가족들이 많이 도와줘서 다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어요. 그 당시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아마도 모두 아셨을 거예요. 가족들에게는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네요."

최성국이 고려대로 진학을 결정한 이유에는 이것 이외에도 또 하나가 있다. 고교 시절부터 본인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이천수가 고려대에 재학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U-19 대표팀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천수형을 사적으로 본 적은 없었고 플레이만 봤었어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정도였고 꼭 한번 같이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배울 점도 많을 것 같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천수와 최성국을 비교하곤 한다. 성격 면에서는 이천수가 활달하고 튀는 성격인데 반해 최성국은 보다 차분한 성격이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현란한 개인기와 폭발적인 돌파력, 축구에 대한 센스, 무엇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분명 유사한 부분이 있다.

"천수형은 좋은 선수예요.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배울 점이 많죠. 특히 남의 좋은 플레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부분이 천수형의 장점이에요. 저 역시 천수형의 장점을 제가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배우는 단계이고 어리기 때문에 천수형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앞으로 계속 노력한다면 저 역시 천수형과 비교될 수 있는 좋은 선수로 클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쨌든 프로행을 마다하고 고려대에 입학한 최성국은 입학 초기에는 전년도에 입은 피로골절 부상으로 인해 고전했다. 공백기간이 있었던 것만큼 체력적으로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에서 서서히 회복한 최성국은 선발과 후반 조커로서의 투입을 번갈아 맡으며 고려대 공격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고 고려대는 험멜코리아배를 비롯해 2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맛봤다.

"2000년 7월에 피로골절 부상을 입은 뒤 12월까지 운동을 못하고 쉬었어요. 12월부터 다시 훈련에 들어갔고 다행히도 팀 동계훈련에는 참가할 수 있었죠. 다만 아무래도 많이 쉬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어 힘든 점이 있었어요.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점점 좋아졌어요. 팀도 좋은 성적을 냈고."

또한 최성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1 FA컵에서도 4골을 기록하며 김은중과 함께 공동득점왕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최성국으로서는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첫 득점왕 타이틀이라 더욱 기뻤던 순간이었다.

이렇듯 입학 첫해에 2개 대회 우승과 FA컵 득점왕 등 좋은 성과를 맛봤던 최성국이지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고려대가 너무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처음 입학한 1학년들이 많았잖아요. 10만에 가까운 잠실운동장 대관중의 광적인 응원에 휩싸여 제대로 경기를 펼치지 못했죠. 한마디로 경험부족이었어요."

"개인 플레이가 많았다는 부분은 인정해요. 그러나 고려대는 예전부터 좋은 선수들을 많아 팀웍보다는 개인기 위주의 스타일로 경기를 펼쳤다고 생각해요. 2학년으로 올라간 뒤 김병수 코치님이 새로 오셨는데 그 분이 오신 뒤부터 팀 조직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에 의존해서 플레이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해서 말이죠."

방금 이야기가 나왔듯이 김병수 코치의 부임은 최성국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역 시절 '비운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김병수 코치는 소신있고 철학이 담겨있는 지도법으로 선수들을 지도했고 최성국 역시 비록 배운 기간은 짧았지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실 처음에는 김 코치님께서 현역시절에 얼마나 화려하게 보내셨는지 몰랐었어요. 지도하시는 방식을 보니까 정말 좋은 지도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보통 지도자 분들은 팀과 조직력만을 강조한다면 김 코치님은 개개인을 가르치시면서 그 속에서 조직력을 가르치시죠. 2학년 때 제가 대표팀에 워낙 많이 나가있었기 때문에 다 합쳐서 1달 정도밖에 가르침을 받지 못했지만 실력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청소년대표 훈련을 하면서도 가르쳐주신 부분을 생각하고 연습하고 그랬죠. 좀 더 배우고 싶었는데 저도 울산 현대에 입단하고, 김 코치님도 포항 2군코치로 가셔서 아쉬워요. 지금도 연락하고 있고,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면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그러셨으니까 전화 드려야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배우고 싶어요."

김병수 코치가 부임했던 2002년, 최성국은 U-19 대표팀과 월드컵대표 연습생으로 뽑히며 그 어느해보다 알차고 기억에 남는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이 해야말로 '축구선수 최성국'이 국내축구팬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해이기도 하다.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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