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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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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백승철, “부상으로 선수생활 마감해야했던 불운의 캐논슈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백승철 인터뷰..
수소문한 끝에 운봉공고 코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하게됐지..
캐넌슈터로 K리그를 뜨겁게 달구던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감회가 새롭더라..

인터뷰 도중 부상에 관련된 억울함을 이야기할 때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던 백승철 코치..

다시 힘내서 지도자로 대성하시길~~

2004년 11월 22일 KFA 인터뷰..


1998년 10월 21일, 포항과 울산의 K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
치열한 혈투 속에 2-2 동점이었던 후반 51분, 그 해 포항에 입단한 새내기 공격수의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슛이 울산 김병지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며 골네트를 갈랐다. K리그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날 경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골이었다.

모든 축구팬들을 전율케 했던 그 중거리 슛의 주인공은 바로 백승철(29세, 현 운봉공고 코치)이었다. 시종일관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며 조그마한 빈 틈만 보이면 강력한 중거리슛을 뿜어대던 바로 그 선수. 1998년 K리그를 관심있게 본 축구팬들이라면 ‘백승철’이라는 이름 석 자와 골을 넣고 환호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백승철이 프로에서 활약했던 시즌은 1998년과 99년, 단 2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팬들이 백승철을 기억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에 그가 남긴 임팩트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98년 프로 입단 동기들인 안정환-이동국-박성배-정광민 등과 함께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백승철은 비록 팀 동료인 이동국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긴 했지만, 팀 공헌도 면에서는 오히려 앞선다는 평가를 들으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측면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를 모두 소화하며, 폭넓은 활동량으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바로 그것, 전후좌우와 왼발-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날아가는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은 그만의 전매특허였다. 특히 백승철의 중거리슛이 인상적인 것은 다른 선수보다 반 박자 빠른 슈팅 타이밍으로 수비를 곤혹하게 하면서도 슛의 위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점.

그러나 1999년부터 찾아온 부상으로 인해 고전했던 백승철은 잘못된 무릎수술과 그에 이은 재활로 2년여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백승철은 많은 방황을 겪으면서 다시는 축구판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축구가 인생의 전부였기에 2003년 4월 운봉공고 코치로 부임하면서 다시 축구계에 컴백했다.

무릎 부상으로, 더구나 잘못된 수술로 인해 제대로 불꽃을 태워보지도 못하고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스타 백승철.
이제부터 짧았지만 강렬했던 백승철의 축구인생을 한번 만나보도록 하자.

1998년, 영남대를 졸업하고 포항에 입단하다.

1994년 2월, 서울의 영등포공고를 졸업한 백승철은 팀이 전국대회 4강 진출에 실패함에 따라 대학 진학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주위의 추천으로 고교 선배들이 있었던 영남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영남대에서의 4년 동안 백승철은 지역에 있는 연고팀 포항 스틸러스와 많은 연습게임을 치르며 조금씩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전화위복의 계기였다.

결국 1998년 봄, 영남대 졸업과 동시에 백승철은 연고지명으로 포항에 입단하며 프로 세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사실 포항에 입단할 무렵만 해도 무명의 백승철에게 기대를 건 축구팬들은 거의 없었다. 초고교급 유망주라는 칭송을 들으며 입단한 팀 동료 이동국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던 상황이었다.

“고교 때나 대학 때나 항상 운동할 때 ‘분명 나에게 한번은 기회가 온다. 그 기회만 잡자’는 생각이었어요. 포항에 입단한 뒤에도 마찬가지였구요. 처음부터 경기에 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첫해에 고생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가면 분명히 기회가 오니 그 때를 잡자는 생각이었죠.”

“대학 때 포항과 연습게임을 많이 했는데, 그때부터 박성화 감독님이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포항에 입단한 뒤에도 어떻게든 기회를 잡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었고.  패스나 킥, 슈팅이 정확한 편이었던 것이 감독님의 눈에 들었던 것 같네요.”

“그러다보니까 리저브 멤버로 1군 경기에 따라다니기 시작했어요. 후반 끝날 무렵에 출전하기도 하고, 골을 넣으면서 점점 출장시간이 길어지고,  조금 지나서는 선발 출전도 시작했죠. 기회가 왔다는 것을 느꼈고, 그 기회를 잡아 치고 올라가기 위해 계속 노력하다보니 첫해부터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사실 백승철이 프로에 적응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오랜 기간 습관화됐던 플레이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선수 본인도 바꿔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의 스타일, 즉 습관이다.

백승철도 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그러하듯 대학 시절까지 스탠딩 플레이어였다. 수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은 채 공격에서 한방으로 득점만 터트리면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대학까지의 백승철이었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고, 그런 모습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백승철은 달라졌다. 어떻게든 프로에서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육체적인 노력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아마추어 시절에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있어도 기회가 계속 주어지지만, 프로에서는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아요.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바로 끝나는거죠. 입단하자마자 박성화 감독님이 주문하셨던 것은 공격수라고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비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활동량을 최대한 늘려 상대에게 압박을 할 것을 주문하신거죠.”

“사실 저의 경기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선수가 갖추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그 선수는 살아남을 수 있어요.”

“살아남기 위해 감독님의 주문을 이를 악물고 수행했죠. 워낙 많이 뛰어다니다보니 근육경련도 오고, 지쳐서 발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것을 계속 하다보니까 내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고 해야 할까요? 열심히 뛰는 것이 몸에 배었죠. 체력적으로도 별로 힘든 것을 모르게 됐고...그러다보니 득점기회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구요. 당시 포항 관중들이 ‘백승철이는 정말 열심히 축구한다’는 말을 해주셨을 때 정말 기뻤죠. 내 노력을 이제야 팬들도 알아주는구나하고..”

“한가지 더 밝히자면 그 때는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포항에는 (박)태하 형이나 (고)정운이 형 같은 고참 선배들이 계셨는데, 그 형들은 경기장에서 엄청 뛰어다니거든요. 고참 형님들이 그렇게 뛰어다니는데 이제 막 입단한 새파란 애송이가 어떻게 가만히 서있겠어요. 죽도록 뛰어야지..(웃음)”

프로축구의 르네상스를 만끽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백승철은 서서히 포항의 주축 멤버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1998년 초에 열린 아디다스컵과 필립모리스컵을 거치면서 2골-2도움으로 팀의 감초 역할을 했던 백승철은 7월부터 시작된 정규리그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7월 18일 안양(현 서울)과의 개막전과 22일 울산과의 2차전에서 연속골을 터트렸고, 전북과의 5차전에서도 1골을 추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침 1998 프랑스월드컵이 끝난 뒤 불어 닥친 엄청난 축구열기와 함께 백승철은 팀 동료 이동국과 함께 포항의 젊은 스타로 폭발적 인기를 구가했다.

1998년 K리그에서는 이밖에도 부산의 안정환, 전북의 박성배, 안양의 정광민 등 98년 입단 동기들과 기존의 고졸 출신 고종수(수원), 김은중(대전)까지 스타 플레이어로 주목받았고,  경기장은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하는 등 K리그는 완연한 르네상스였다.

당시 프로축구의 인기를 직접 체험한 백승철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어느 경기장을 가도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죠. 축구선수가 많은 관중 앞에서 뛰는 것만큼 행복하고 흥분되는 것이 없어요. 그때는 그런 것이 있었죠. 가득 찬 관중과 거기서 뿜어지는 열기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 분위기는 축구 시작한 이래 처음 만끽하는 것이니까 너무 벅차더라구요.(웃음) 유럽, 남미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었거든요. 너무 행복했죠.”

“서포터즈의 존재라는 것도 처음 느끼게 됐어요. 사실 경기하다보면 관중들이 하는 말들은 거의 들리지 않거든요. 그런데 서포터의 구호나 응원가는 귀에 들어와요. 수백-수천명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니까요. 그런 것이 큰 힘이 되죠. 원정 경기에서도 서포터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게 되고...더구나 홈에서는 서포터즈 뿐 아니라 일반 관중들조차 한 목소리로 응원해줬거든요. 그런 것이 감동이었죠.”

성공 뒤에 찾아온 정신적인 느슨함을 극복하다.

이렇듯 포항의 무서운 신인으로 자리 잡을 무렵 백승철에게도 시련이 다가온다. 주위의 엄청난 환호와 K리그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생기게 된 정신적인 느슨함이 겹치면서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던 것.
대학시절까지 무명으로 지내며 팬들의 환호와 관심을 받지 못했던 백승철로서는 너무나 급작스런 환경변화가 독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결국 백승철은 8월 19일 시즌 5호골을 성공시킨 뒤 9월 19일까지 한 달 동안 단 1골을 기록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무명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유명해지면 자만에 빠지기도 하고, 약간은 건방져지기도 하잖아요. 그때가 그랬었던 것 같아요.  한달여 동안 게임을 제대로 풀지 못했는데, 그럴 무렵 박성화 감독님이 1:1 면담을 하자고 하시더라구요. 따끔하게 이야기를 들었죠.”

“그때 감독님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그 시즌 힘들었을 거예요. 주위에서 알아봐주지, 여학생들도 몰려오지, 아마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웃음) 그걸 계기로 다시 정신 차리고 좋은 경기 할 수 있었어요.”

프로 입단 당시의 초심을 되찾은 백승철은 이후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남은 정규리그 7경기에서 6골-1도움을 기록한 것. 1경기당 공격 포인트 하나씩은 기록한 셈이다. 입단 초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백승철이 리그가 끝나갈 무렵에는 포항 전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절대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입단동기였던 이동국과의 투톱 호흡을 이루다.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입단동기인 백승철과 이동국은 다른 면이 많았다.
백승철이 대학 시절까지 철저한 무명이었던데 반해 이동국은 포철공고의 중심 스트라이커로서 고교 무대를 평정했다. 백승철이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연고지명으로 포항에 입단했을 때 이동국은 초고교급 선수로 각광받으며 화려하게 프로무대에 입성했다.

플레이 스타일을 봤을 때도 이동국이 타고난 신체조건을 이용한 공격과 문전 앞에서의 천부적인 골감각이 돋보였다면, 백승철은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며 약간의 빈틈만 생기면 특유의 반박자 빠른 중거리슛으로 상대를 공략했다.

이렇듯 다른 스타일이었던 둘 간의 투톱 조합은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포항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이동국은 최전방에 배치되고, 백승철이 약간 처져 쉐도우 스트라이커 역할을 하며 포항의 공격을 주도해나갔다.

이 젊은 두 명의 공격조합은 그동안 팀의 중심 스트라이커였던 황선홍이 부상과 대표팀 차출, 그리고 일본행 등으로 단 3게임만을 소화했고, 그밖에 이렇다 할 공격자원이 없던 포항으로서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시즌 초에는 제가 주로 측면 미드필더로 뛰었기 때문에 동국이와 투톱으로서 짝을 이루지는 않았어요. 조금 지나서 제가 공격으로 올라가면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죠.  우리 둘은 사실 다른 점이 많았죠. 플레이스타일도 다르고, 경기장 밖에서의 모습도 달랐어요.”

“그렇지만 서로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던 기억이 나요. ‘이럴 때는 이렇게 하자, 저런 상황에선 이렇게 하자’ 이런 식으로요...둘 다 어렸었고, 더구나 동국이는 고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 같은 것 전혀 없이 그냥 재미있었죠. 동국이가 ‘형, 오늘 골 넣으면 뭐할래요? 나하고 같이 놀아요’ 이런 말도 많이 했고..”

“둘 다 열심히 했고, 재미있게 생활했죠.  물론 인기는 동국이가 훨씬 많았어요. 가끔 경기 끝나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동국이 옆자리에 앉곤 했는데, 동국이를 연호하는 팬들의 환호에 깜짝깜짝 놀랐었죠. 동국이가 손 한번 흔들면 밖에 있는 여성팬들이 다 자지러지기도 했고..(웃음)”

-> 2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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