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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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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현역 은퇴한 강철, “1990년대를 풍미했던 영리한 수비수”

2004년 9월 19일 KFA 홈페이지..


-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 넘어가보자. 당시 같이 뛰었던 서정원, 노정윤, 신태용 선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대표팀 생활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들을 하던데.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멤버도 너무 좋았고, 코칭 스태프도 좋았다. 투자도 많이 해서 유럽전지훈련도 몇 번 갔었던 기억이 난다. 선수들이 자신감에 차있었고, 평가전에서도 연승을 거두곤 했다. 청소년대표팀과는 달라서 준국가대표팀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부심도 컸다.

그리고 당시 감독님이었던 크라머 감독님은 내가 처음 접해본 외국인 감독이었는데, 운동을 너무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당시만 해도 훈련이 너무 딱딱해서 선수들은 ‘아, 운동이 언제나 끝나나?’ 이런 식이었다.(웃음)

그런데 크라머 감독님이 오면서 선수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놨다. 운동을 많이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에너지를 100% 발휘할 수 있게끔 재미있게, 마치 레크리에이션과 같이 가르치셨다. 훈련 스케줄도 체계적이었고...

그러다보니 선수들이 운동시간이 기다려지고, 분위기도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승세를 타고 올림픽에 갔는데, 3무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축구를 하면서 그때처럼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크라머 감독이 너무 자유스럽게 가르치다보니 조금 느슨해졌다는 평가도 있었는데.

일단 훈련량이 적고 쉬는 시간이 많다보니까 그 시간에 뭘 해야 할지를 잘 모르긴 했지만, 크게 문제될 부분은 없었다. 코치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하더라도 밤에 나가서 술 마시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한국축구는 훈련량이 많았는데, 훈련량을 2/3로 줄이니까 주위 사람들이 비판을 했던 것 같다. 한국축구가 뛰는 축구인데 연습에서 많이 뛰지를 않으니까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체력적인 부분도 체계적으로 올렸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2000년에 중국에 갔을 때 크라머 감독님을 한번 뵌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정정하시더라.  “깡출!” 이러시면서 안아주시는데 뭉클했다.

-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들과는 지금도 자주 만나나?

가끔씩 연락은 하는데, 서로 떨어져 있고 바쁘다 보니까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진 않다. (정)광석이 형이나 (서)정원이 형, (신)태용이 형 등 선배들이 추진하면 후배들도 자연히 따라갈테니까 한번 모임을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역시 잊을 수 없는 대회였을텐데.

눈물만 흘렸던 대회였다.  8강전에서 일본에게 3-2로 이겼을 때 너무 좋아서 한번 울고, 우즈베키스탄과의 4강전에서 진 뒤 너무 억울해 또 한번 울었다. 우승하면 군대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는 0-1로 지고 있을 때 경기장 안에서 울면서 선홍이형한테 “제발 골 좀 넣어줘”하고 외쳤다. 선홍이 형이 “알았어. 기다려”하고 이야기했는데, 결국 골은 나오지 않았다.(웃음)

경기 끝나고 운동장에 큰 대자로 누워서 울었다. 당시 경기내용은 거의 9 : 1에 가까울 정도로 일방적인 우리의 공격이었는데, 단 한번의 슛기회에서 실점을 했다. 그때 골키퍼가 (차)상광이 형이었는데, 우즈베키스탄의 평범한 중거리슛을 실수로 놓쳐 실점했다.  당시에는 야속한 마음도 있었다.(웃음)
나 뿐 아니라 8명의 선수가 그때 군대문제가 걸려있었기에 서로 너무나 아쉬워했다.  이제는 다 흘러가서 아련한 추억이 됐지만...

-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막판에 와일드카드로 합류해 두번째 올림픽 출전을 기록했는데.

첫 게임 스페인전이 열리기 이틀 전에 합류했다. 원래 명보 형이 와일드카드였는데, 부상을 당하면서 내가 급하게 합류하게 됐다. 가보니까 명보형이 갑자기 빠져서 그런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명보 형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합류했던 (김)도훈이와 (김)상식이가 뭔가 분위기 전환을 시켜줬어야 했는데, 그 점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그리고 맞이한 스페인전에서 0-3으로 완패했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연세대 동기인 도훈이를 불렀다. 도훈이에게 “이대로 가면 안된다. 너랑 나랑 뭔가를 보여주자”고 이야기했다. 도훈이가 “어떻게 보여주냐?”고 하자 “우리 둘이 나가서 머리를 빡빡 밀고 오자”고 했다. 도훈이도 좋다고 해서 머리를 깎으려고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도대체 이발소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웃음) 그래서 결국 못깎았다.(웃음)

어쨌든 그 정도의 각오로 선수들을 한명씩 방으로 불러서 다독거리며 분위기 전환을 유도했고,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길 수 있었다. 첫 경기에서의 패배가 부담이 되면서 결국 8강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 이제 프로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1993년에 유공(현 부천SK)에 입단하면서 처음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많은 차이가 있다. 일단 운동장부터 격이 다르다. 그 때는 여기가 맨땅인지, 잔디운동장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열악했었다. 관중들도 지금과는 달라서 경기장에서 고기 구워먹고, 소주병이 경기장에 날아오고 그랬다.(웃음)

관중수도 매우 적었고, 행정적인 면에서도 안이해서 평일 3시에 경기를 하기도 하고, 한 경기장에서 연속으로 두 경기가 열리기도 하고...
이런 것과 비교해볼 때 지금 젊은 선수들은 혜택을 많이 받는 셈이다.

물론 경기력 측면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일단 운동장이 지금은 모두 양탄자같은 4계절 잔디라 마음먹은대로 패스하고 트래핑할 수 있지만, 당시는 볼을 차면 퉁퉁 튀기며 불규칙적으로 오기 때문에 미리 주위를 살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볼을 제대로 잡는 것이 급했다. 지금은 잔디가 좋으니까 주위도 살피면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니 더 좋은 플레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술이나 훈련방법 등에 있어서도 지금은 선진화됐지만, 그 당시는 많이 부족했다. 당시에는 연습을 3-4시간 연속으로 하곤 했으며,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훈련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술적인 면도 고려하고, 세트 플레이 등 좀 더 세밀한 부분에까지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비디오와 데이터를 이용한 분석도 하는 등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는 더욱 치열해졌지만, 좋은 플레이도 더 많이 나오고, 그 때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올라서면서 어떤 차이점을 느꼈나?

일단 축구를 하면서 돈이 생긴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웃음) 그만큼 책임감이 더 생기고, 때로는 그 책임감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도 한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팀을 위해 뛰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축구가 직업이 됐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자제하는 등 자유를 조금 빼앗기기도 한다.

단지 학교를 위해서 볼을 차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돈을 받고 그 구단을 위해 뛴다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을, 더 나아가 내 가족의 생활을 위해 볼을 찬다는 것이 아마추어와의 차이점이다.

- 1994년 말에 니폼니쉬 감독이 부임하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그 ‘부천축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됐는데. 그 당시 이야기를 해달라.

니폼니쉬 감독님은 크라머 감독님보다도 더 편했다. 예를 들어서 동계훈련이라고 하면 모두들 강도 높은 체력훈련이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분은 동계훈련 3개월 동안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한달은 쉬고, 한달 정도는 오전에는 에어로빅과 웨이트 트레이닝, 오후에는 수영 등을 했다.

잔뜩 긴장해서 동계훈련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에 우승해야겠다는 각오로 훈련장에 나왔는데, 그런 훈련을 하니까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중에는 불안해지더라. 이렇게 해도 되는건지...

그래서 미팅할 때 감독님께 왜 이렇게 하는거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동차나 모든 기계가 오래 쓰고, 많이 쓰면 어떻게 되냐?”고 되물으셨다. 그래서 “고장납니다”하고 말했더니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7-8개월 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 동계훈련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무리해서 뛰면 되겠느냐. 뛸 때 되면 다 뛰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나를 따르도록 해라”고 말하셨다.
그러고나서 훈련을 유심히 살펴봤더니 시즌 개막에 포커스를 맞춰서 체력을 차근차근 올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또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기존의 감독님들은 실수를 하면 바로 앞에서 지적하곤 했다. 나도 대표선수도 많이 하고 그랬지만, 동료나 후배, 선배 앞에서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니폼니쉬 감독님은 달랐다. 내가 만약 실수를 했으면 며칠 뒤에 운동하러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했다. “너 그때 이렇게 했는데, 감독인 내가 봤을 때는 이렇게 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왜 그렇게 했냐? 다음엔 그렇게 하지마라”라고...
그러면 이런 부분이 틀렸구나 하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고, 다음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해서 하지 않게 된다. 그런 부분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운동하면서 크라머 감독님, 니폼니쉬 감독님, 비쇼베츠 감독님, 히딩크 감독님, 오스트리아에서 있을 때 감독님 등 총 5명의 외국인 감독을 만났는데, 지도자교육을 받으면서 그 경험들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 부천축구는 당시로는 보기드문 조직적이면서 세련된 축구였으며, 미드필드에서부터의 아기자기한 패싱게임 등이 인상적이었다. 선수들이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그 때 니폼니쉬 감독님이 4년 정도 계시면서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놓고 조윤환 감독님께 물려주셨다. 그리고 조 감독님도 니폼니쉬 감독님 밑에서 계속 배우셨던 분이라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하셨고...

그렇게 오랜 기간 반복하다보니까 그 스타일이 선수들의 몸에 배었다. 그러다보니 연습때나 시합때나 플레이가 몸에 배어있고, 내가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면 그렇게 되고, 내가 볼 잡아서 어디로 차면 누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차면 정말 거기에 동료가 있는,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 당시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부천의 재미있는 축구와 함께 서포터 ‘헤르메스’의 열정적인 서포팅, 그리고 선수들과 서포터들의 유대감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헤르메스의 몇몇 분들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예전 일을 회상해본다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무튼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포터들이 항의의 표시로 경기장에서 서포팅을 하지 않고 침묵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목동에서 대전과의 경기였는데, 홈인데도 경기내용에서 계속 밀렸다. 당시 내가 주장이었는데, 볼이 밖으로 나갔을 때 서포터들을 향해 박수를 치면서 서포팅을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내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여성 서포터분들은 울고...

전반이 끝나고 서포터 내부에서 이야기가 오갔나 보더라. 선수들이 우리를 원하는데 서포팅해줘야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고, 결국 후반에는 열정적인 서포팅을 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2-1로 그 경기를 이겼다.

그 일로 해서 서포터들과 내가 정말 친해지게 됐고, 감독님과 상의해서 선수들이 모은 돈으로 서포터들에게 지방 원정비로 사용하라고 전달해주기도 했다.

- 경기가 끝난 뒤 어깨동무를 하고 서포터들과 함께 ‘랄랄라 송’을 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 서포터나 팬들에게 우리가 해줘야할 부분인 것 같았다. 운동장에 다시 오고 싶은 무엇인가를 만들자는 의도였다. 서포터들이 랄랄라 송을 할 때 우리가 같이 호응해준다면 서포터들과 팬들도 좋아할 것 같았고, 특히 서포터들과는 승부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선수들과 상의한 끝에 하자고 마음먹었고, 결과적으로 서포터, 관중들과 하나가 됐다는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예전에 박태하 선수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당시 박태하 선수는 “요즘 어린 선수들은 서포터나 관중의 환호를 너무나 당연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이 없었을때도 축구를 했던 우리 세대에서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했었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술먹고 선수 욕하는 관중들만 있었지 서포터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태하형 말대로 요즘 젊은 선수들이 그런 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우리 선배님들부터 노력해서, 우리 세대를 지나면서 계속 쌓아온 관중들이고 서포터들이다.
그들의 환호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되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고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서포터와 관중들 앞에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팬들이 우리를 사랑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서포터 이야기가 나와서 한마디 더하자면 얼마전 은퇴식할 때 서포터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내 유니폼에다가 서포터들이 한마디씩 써서 주셨는데, 그들의 진심이 들어간 유니폼을 받고 눈물이 났다. 나를 사랑해주고, 좋아해준 팬들의 힘에 의해 내가 지금까지 축구를 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3편에서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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