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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K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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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왼발의 달인' 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축구영웅"

2003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기사..


98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던 1998년 1월 하석주는 일본 J리그로 이적했다.

당시 고정운, 홍명보 등 한국축구의 간판스타들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하석주와 황선홍 등이 J리그 진출을 타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석주에게 접근했던 팀들은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와 세레소 오사카, 베르디 가와사키(현 도쿄 베르디) 등 세 팀이었고, 사실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던 팀은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였다. 그러나 하석주의 선택은 세레소 오사카였다.

"당시 먼저 진출해 있던 고정운 선배나 명보 같은 경우 저와 대표생활도 오래했고, 친한 선수들이었어요.  부산 대우와 재계약할 때 우승하면 해외진출을 허락한다라는 조건을 달았고 97년도에 팀을 3관왕에 올려놨기 때문에 저도 나가고 싶었죠. 마침 월드컵 예선에서의 좋은 활약 등으로 해서 일본에서 제의가 와서 나가게 됐습니다."

"세레소 오사카를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먼저 오사카에 한국인이 많고 한국인 학교가 있다고 들었죠. 아이들 교육 때문에 필요했어요. 그리고 팀에 이미 고정운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죠."

세레소 오사카에 합류, 첫 훈련을 시작한 하석주는 한국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분위기에 놀랐다. 일단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은 만족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외국인, 특히 한국 선수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우선 경기장이나 훈련장이 사철 잔디였기 때문에 겨울임에도 너무 좋았고, 운동 스타일도 사생활을 전혀 터치하지 않고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편했어요. 뭐 요즘에야 우리나라도 시설면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많이 좋아졌지만 말이죠."

"그러나 외국인, 특히 한국 선수에 대한 무시랄까, 텃세 같은 면도 굉장히 많았어요. 저도 처음에 힘들었죠. 또한 당시 감독이 마츠키 감독이었는데 자꾸 트러블이 생겼어요. 저와 고정운 선배, 마니치를 비롯해 외국인 선수가 5명 정도 있었는데 고정적인 출장기회를 준다기 보다 이 중에서 3명을 돌려가면서 뛰게 했어요. 이런 부정기적인 출장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기본적으로 한국인 선수에 대한 확실한 신뢰도 없었던 것 같고..."

결국 고정운과 마니치는 시즌 중반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하석주 역시 첫 시즌을 마친 뒤 빗셀 고베로 이적한다. 빗셀 고베로의 이적은 하석주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었다. 이미 김도훈이 팀의 확실한 간판 스트라이커로 자리잡고 있던 빗셀 고베는 여러 모로 하석주에게 잘 맞는 팀이었다.

"빗셀 고베 시절에는 좋았어요. 고생 없이 편하게 지냈고 선수들도 잘해주고, 무엇보다 마츠다 감독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셨어요. 세레소의 마츠키 감독은 제가 떠난 이후에 경질됐다고 하더군요.(웃음) 도훈이가 있으니까 저도 편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고, 나중에 (최)성용이도 왔었기 때문에 편했죠. 1명 정도는 한국인 동료가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해외진출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하석주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가려고 하는 팀의 축구 스타일이 자신과 맞느냐를 따져보고 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했던 플레이 스타일과 상반된 스타일을 추구하는 팀으로 간다면 그만큼 적응하기도 힘들고 성공확률도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하석주의 설명.

"제가 갔던 곳이 일본이니까 일본의 예를 들어보죠. 일단 팀이 많다 보니까 수준 있는 팀들은 상위 5-6개팀 정도이고 나머지는 많이 떨어져요. 축구 자체도 한국과 많이 틀리죠. 한국 선수들이 스케일이 큰 축구를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은 브라질식의 아기자기한 축구를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주문하는 것도 많고 고생할 수가 있어요. 일본에 가려면 그 팀의 축구 스타일을 살펴봐야 됩니다."

"(김)대의 같은 경우도 실력이 있는 선수임에도 실패했던 것이 그 팀(제프 이치하라) 스타일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명보도 벨마레 히라츠카에 있을 때는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결국 가시와 레이솔에 가서 자기 자리를 찾은 것이고.."

"다만 J리그는 스트라이커들이 뛰기에는 좋은 곳이죠. 수비가 거친 맛이 없어서 골을 많이 넣을 수 있거든요.(웃음) 지금은 일본 선수들도 승부욕이 강해져 그때와는 많이 달라지긴 했을 거예요."

일본에 있을 때 하석주의 별명은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오야붕'이었다. 빗셀 고베 시절 얻었던 별명으로 고베의 서포터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그 붙여진 배경이 재미있다.

"서포터들이 '오야붕, 오야붕'하니까 선수들까지도 나를 보면 '오야붕'이라고 하더라구요.(웃음) 제가 옷을 벗어놓으면 도훈이와 성용이가 한국에서 선배를 대접하는 스타일로 제 옷까지 빨래판에 갖다 놓고, 또 옷을 가져오고, 심부름도 알아서 잘하고 그러는 것을 보니까 사람들이 눈이 동그래진 거죠.(웃음)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뭐라고 그러면 걔네들도 덩달아 무서워하고 그러더군요.(웃음) 주장을 맡아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주장은 하지 않았어요. 뭐 일본 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죠.(웃음)"

마음고생을 떨쳐버린 한방- 2000년 한일전 결승골

2000년 4월 26일 잠실운동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친선경기는 하석주에게 있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경기였다. 98 프랑스월드컵에서의 퇴장은 시간이 지나도 하석주의 마음 한 구석에 계속 자리잡아 있었고, 여전히 부담감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일본과의 경기는 하석주에게는 큰 기회였다.

더군다나 1999년 9월 한일 올림픽대표팀간의 친선경기에서 2연패를 당한 이후 열린 한일전이었고, 당시 분위기는 다시 한번 일본에게 패했을 경우 허정무 감독의 경질이 예상될 정도였다.

"사실 한일전을 할 때는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뭐 다른 나라한테 지는 것은 그래도 용서가 되지만 일본한테 지면 끝나기 때문이죠.(웃음) 선수나 스태프나 경기 며칠 전부터 긴장하고 그렇게 됩니다. 한국에서 하는 한일전은 월드컵 못지 않은 부담감과 긴장감을 느끼죠."

하석주는 이날 한일전에서 왼쪽 윙백으로 선발 출장했고,  경기는 후반 중반이 넘어선 시점까지도 0-0 팽팽한 승부였다. 그런 와중에 후반 27분 김태영이 경고 2회로 퇴장을 당했고 한국은 숫적 열세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후반 33분 윤정환의 패스를 받은 하석주가 골 에어리어 밖에서 그대로 왼발슛을 시도했고, 이것은 기가 막히게 휘어 들어가며 일본의 골문을 갈랐다.

잠실운동장은 환호의 물결로 가득했고 하석주는 지금까지의 마음고생을 모두 날려버리는 듯한  환한 웃음과 함께 특유의 비행기 세레모니를 펼치며 기쁨을 만끽했다.

"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가장 비중 있는 경기였고 부담이 많이 됐었어요. 더군다나 허정무 감독님이 올림픽대표팀으로 일본에게 2연패를 당했고 이번에도 지면 경질이란 말까지 있었거든요.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에서 경기에 임했고 중간에 태영이마저 퇴장 당했죠. 그런 상황에서 제 슛 하나가 골로 연결된 것이었어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그 골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었죠."

"그 경기가 있기 한달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제가 게임 전에 한번도 기도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기도를 했어요. '아버지, 한번만 도와주세요. 이번이 내 마지막 대표생활이 될 수도 있어요, 98월드컵 이후 너무나 힘들었는데 이번 한번만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죠."

"그것이 효험을 봤는지 골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들어가 버렸죠.(웃음) 원래대로라면 수비를 맞아야 하는 코스인데 그것을 피하고 골대 맞고 들어가 버렸으니...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죠. 제가 대표 생활하는 동안 총 7번 정도 한일전을 했는데 97월드컵 예선(일명 도쿄대첩)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한일전이었습니다.  경기후에 MVP로 뽑혀서 산삼을 선물로 받았는데 후배들이 한뿌리만 먹어보자고 해서 난리났었죠(웃음)"

또한 이 경기에서 있었던 일본 최고의 스타 나카타 히데토시와의 자그마한 에피소드 역시 경기를 떠올릴 때마다 하석주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추억이다.

"태영이가 퇴장당했을 때였어요. 제가 일본어를 약간 할 줄 아니까 나카타한테 다가가서 '나카타! 한번 봐주라. 우리 홈이고 한데 지면 곤란해'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했거든요.(웃음) 그랬더니 나카타가 막 웃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결승골을 넣고 우리가 이겨버리니까 경기 끝나고 나카타가 내게 오더니 '하 상! 이래도 되는거야..'하면서 웃더라구요. 재미있는 추억이죠."

대표팀 은퇴시기가 다가오다- 2000 아시안컵

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동시에 맡게된 허정무 감독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초점을 맞춰나갔고 이 과정에서 올림픽대표팀의 신예들은 자연스럽게 국가대표팀에 진입했다.

이영표 역시 그 중 한명이었고, 이영표의 주 포지션은 바로 하석주의 위치인 왼쪽 윙백이었다. 99년 6월 코리아컵을 기점으로 서서히 왼쪽 윙백은 이영표의 몫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2000년 아시안컵에서도 하석주는 교체멤버로 기용됐다.

한국은 2000 아시안컵에서 조 예선을 1승 1무 1패로 마쳐 중국, 쿠웨이트에 이어 와일드카드로 간신히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중동의 강호' 이란을 연장접전 끝에 물리치고 4강에 진출했으나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패하며 3/4위전으로 밀려났고 중국과의 재대결에서 승리하며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성적 자체로만 볼 때 나쁜 것만은 아닌 성적이었지만 경기력에 대한 불만은 결국 허정무 감독의 퇴임을 불러왔다. 하석주 본인으로서도 한국이 치른 총 6게임에서 3게임에 교체로 출장하는데 그치며 이제 서서히 유능한 후배들에게 대표팀 자리를 물려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회였다.

"그 때가 대표팀 은퇴 시기가 다가오는 시점이었죠. 사실 지금까지 대표팀에서는 거의 풀게임으로 뛰었는데 교체로 들어가 반게임 뛰고 그러니까 노장으로서 창피한 부분도 있었죠. 돌아가면 대표팀은 정리하자라는 마음이었고 돌아온 이후 실제로 대표팀에 대한 미련은 버렸어요. 개인적으로 영표와는 친한데 좋은 선수가 나왔고, 이제 영표가 있으니 내가 물러나도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력 측면에서는 사실 부족한 부분이 많았어요. 중동 선수들은 세대교체도 많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우리는 원활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죠. 또한 우리는 시드니 올림픽에 너무 치중하느라 대회에 임하는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것도 있는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감독님께서도 성적에 대한 부담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선수들에게 많이 주입했는데 선수들은 거기에서 부담을 많이 느꼈고 왠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죠."

3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K리그에 복귀

이 때를 즈음하여 하석주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K리그 복귀를 모색한다. 가족과 장기간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였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에서 좀 더 뛰고 싶었어요. 그런데 가족과 2년 동안 떨어져 있다보니 더 이상은 안되겠더라구요. 돈보다는 가족이다라는 생각을 했죠. 원래 1년만 더 있다가 온다는 것이 고베의 만류로 2년이 된 것이고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할 시기라고 판단해 돌아온거죠."

"처음에는 가족이 모두 일본에 왔는데 아내와 애들이 교육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특히 애들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토피성 피부염도 생기는 등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한국에 보내자라고 결정했죠. 한국으로 보냈더니 애들도 너무 좋아하고 아토피성 피부염도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해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됐는데 저로서는 중간에 왔다갔다하긴 해도 2년 넘게 떨어져 살다보니까 너무 힘들더라구요."

하석주가 복귀의사를 밝히자마자 국내 구단들은 앞다퉈 영입을 추진했다. 어느덧 33살의 노장이었지만 여전히 왼쪽 윙백으로서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하석주의 노련함과 팀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팀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안양과 부산, 포항 등에서 강력한 영입의사를 밝혔고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팀은 안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하석주 영입에 성공한 팀은 포항이었다.

"안양 조광래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굉장히 친하고 안양 구단도 적극적이어서 그 쪽으로 갈 줄 알았어요. 그리고 친정팀이었던 부산에서도 연락이 왔고, 특히 부산 서포터들이 와달라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사실 포항은 생각도 안했었죠.(웃음)"

"거의 안양으로 굳어진 상황이었는데 매니저 문제 등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면서 포항으로 가게 됐죠. 최순호 감독님도 도와달라고 전화가 왔고..조 감독님께는 정말 미안하게 됐고 사과드렸죠. 처음에는 조금 섭섭해하시기도 했는데 지금은 자주 전화도 드리고 잘 지내고 있어요."

2001 컨페드컵 프랑스전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다.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정식으로 부임했고 하석주는 4월에 열린 이집트 4개국 대회 명단에 뽑히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2경기에 모두 출장했으며 특히 이집트와의 결승전에서는 선제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골은 하석주 본인의 A매치 통산 22번째 골이었고, 그의 A매치 마지막 골이기도 했다.

"원래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은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집트 4개국 대회에 뽑혀서 일단 갔는데 갔다온 이후 이제는 정말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죠. 저라고 월드컵에 대한 꿈이 없었겠어요? 더군다나 홈에서 열리는 대회인데...그러나 좋은 후배들이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히딩크 감독님에게 이야기했어요. 그 때가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앞두고 있을 때였죠."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이 '나이가 많아도 너는 성실하고 아직도 뛸 수 있다. 괜찮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컨페드컵 명단이 이미 발표된 시점에서 합류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단 컨페드컵까지는 나갔어요. 그리고 개막전이었던 프랑스전이 제 마지막 A매치가 되었죠."

어찌 보면 대표팀 은퇴시기를 약간 놓친 것 같아 하석주로서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실제로 컨페드컵 이후 하석주는 더 이상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았고, 대표팀 은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도 없었기에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어느새 대표팀 은퇴경기도 없이 하석주의 존재는 잊혀지고 말았다. 대표팀 은퇴경기를 치러주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경력을 갖춘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1년간의 대표팀 생활,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정든 대표팀을 떠날 때의 하석주의 마음은 어땠을까.

"11년간 대표팀 하면서 참 힘들었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합숙에다 뭐다 해서 거의 가정을 떠나 있었죠.(웃음) 애 낳는 것도 보지 못하고, 애들이 어떻게 크는지도 모르고, 집에 가면 어느새 한 뼘은 더 커있고...(웃음) 시합에서 지면 질타도 많이 받고...생각해보면 대표팀 생활 11년은 너무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쉬움이 있다면 축구인으로서 홈에서 열리는 2002월드컵을 밖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죠. 아마 출전하지 못한 모든 선수들이 그런 마음이었을 거에요. 특히 저 같은 경우 대표팀 생활을 오래했던 만큼 '그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아쉬움은 더 크죠. 뭐 각오했던 바이니까 아쉬움이 많아도 어쩔 수 없죠."

25년 선수생활을 마감하며..

대표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하석주는 정열적으로 K리그 그라운드를 누볐다. 전력의 짜임새가 떨어진 '왕년의 명가' 포항의 주장완장을 차고 후배들을 독려했으며 그 어떤 선수보다 열심히 뛰었다. 2002년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위치를 옮기며 중앙에서 노련한 볼배급을 선보이기도 하는 등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

그리고 2002시즌이 끝난 후 하석주는 선수생활을 마감한다고 밝혔다. 포항으로서는 아직 기량과 체력이 충분한 만큼 1-2년 정도 더 뛰어 주기를 바랬으나 하석주는 지도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축구로만 25년 세월을 보낸 하석주였고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시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말 축구에 눈을 떴던 시기는 32세 정도였어요. 좀 더 빨리 찾아왔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죠.(웃음) 다시 태어난다면 더 멋있고 좋은 축구를 더 일찍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해요.(웃음)"

"제 축구인생을 돌이켜보면 후회스런 부분도 많고 중간중간 힘든 부분도 많았는데 잘 넘기면서 왔고, 무엇보다 25년 선수생활을 하면서 큰 부상 없이 잘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 만족스러워요."
.

지도자 생활에 대한 각오

하석주는 선수생활을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프로팀의 코치로 발탁됐다. 이것은 하석주 본인에게 커다란 행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성급한 선택일 수도 있다. 가장 큰 무대인 프로무대에서 코치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이긴 하지만 반대로 잠시 공백기간을 두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 한편 전문적인 코치교육을 받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석주는 고민 끝에 포항 코치직을 수락했고 치열한 K리그의 순위경쟁 속에서 실전코치경험을 쌓아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축구를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 하석주의 꿈이다.

"조광래 감독님의 카리스마와 최순호 감독님의 부드러움을 적절히 섞은 지도자가 제 목표입니다.(웃음) 적절한 리더쉽과 포용력을 갖고 있는, 중용을 유지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고, 노력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고, 선수들이 창의력을 갖고 축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선수들에게 프로의식을 강하게 주입하는 것 역시 중요해요. 운동장에서만큼은 정말 진지하고 상대를 보면 눈에서 살기가 돌 정도의 강한 모습을 지닌, 지는 것에 대해 절대 쉽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선수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나요?(웃음)"

"코치로 어느 정도 고생을 한 뒤에는 프로팀이 아니더라도 대학이나 고교팀에서 감독을 맡아 내가 추구하는 축구를 해보고 싶어요. 스피디하면서도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선수들로 뭉쳐진 탄탄한 팀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하나의 완성된 감독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겠죠."

하석주가 기대하고 있는 선수들

축구선배로서 하석주가 기대하고 있는 후배는 누구일까. 역시 대선배가 기대하고 있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기관리에 충실하고 지독한 노력파 선수들이었다. 바로 송종국과 박지성, 설기현과 같은 선수들 말이다.

"(송)종국이와 (박)지성이, (설)기현이가 기대되는 선수들이에요. 처음 합숙 같이 할 때 이 선수들은 모두 소위 뜨기 전이었죠.(웃음) 종국이 같은 경우 저녁마다 웨이트 트레이닝 등 여러 운동을 하더라구요. 몸관리도 철저하고 거기에 플레이하는 것을 보니 굉장히 클 수 있는 선수라는 예감이 왔어요. 지성이나 기현이도 마찬가지이고. 정말 성실한 선수들이었어요. 그 때부터 제가 눈여겨봤죠."

"히딩크 감독님이 부임한 이후 기현이가 처음 룸메이트였고, 종국이가 그 다음이었거든요. 우리 선수들 중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한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 선수들은 자신의 몸관리가 정말 철저해요. 계속해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해나간다면 큰 선수들이 될 거에요."

축구팬과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마지막으로 하석주에게 축구팬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하석주는 축구팬들에게는 지도자로 출발하는 자신에 대한 격려와 관심을 부탁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축구에 대한 투자를 당부하는 한편 월드컵 4강으로 인한 국민들의 높아진 기대치에 대한 후배들의 부담감을 걱정했다. 하석주 본인도 그 부담감과 중압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걱정됐을 것이다.

"먼저 축구팬들에게 이야기하죠. 현역으로는 떠났지만 축구계에서 남아있는 것이고 지도자로서 새출발하는 것이니까 끝까지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선수 때 보다 지도자로 커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있고 재미있으실 겁니다.(웃음) 팬 여러분들이 선수 때와 같이 격려해주신다면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도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한마디 해야죠.(웃음) 예전과 달리 요즘은 축구를 조금만 잘하면 굉장히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요즘 후배들은 축구에 대한 시간 투자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 아쉬운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잠시 미뤄두고 축구에만 전념하길 바랍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4강을 이뤘지만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것 같아요. 8강 뿐 아니라 16강도 쉽지 않죠. 앞으로 또다시 한국축구는 1승과 월드컵 16강을 목표로 잡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월드컵의 벽은 높고 더군다나 유럽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더욱 힘들죠. 후배들도 이 사실을 잘 알겁니다."

"현재 종국이, 지성이, 기현이, 영표, 두리, 을용이가 유럽에 나가있는데 그 잔디에서, 그 분위기 속에서 그들과 경기를 하고 있는데 하다보면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거예요. 앞으로가 더 중요해요.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아져 이제는 16강은 당연히 가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것 때문에 후배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부담감도 많아질겁니다. 우리 후배들이 이런 것을 잘 견뎌내고 극복하길 바랍니다. 그럴만한 능력들을 갖고 있으니까..."

끝.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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