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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현역 은퇴한 강철, “90년대를 풍미했던 영리한 수비수”


2004년 9월 20일 KFA 홈페이지..


- 9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수원과의 라이벌전이 대단했었다. 두 팀이 붙으면 경기 자체도 매우 재미있었고.

그 때 수원은 김호 감독님이셨는데, 축구 이론적으로도 지식이 풍부하신 분이다보니까 선수들도 거기에 맞춰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많이 했었다. 스타급 선수들도 부천보다 많이 있었고...

사실 처음에는 선수들간에는 라이벌 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서포터들끼리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난리였고...
그러다보니까 선수들도 거기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웃음)

게임 내용도 재미있고, 선두다툼도 같이 하다보니 선수들도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고, 수원만 만나면 자연히 정신력이 150%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좋은 경기도 많이 했고, 너무 과열되어서 거친 게임도 하고 그랬다.

특히 1999년 여름에 목동에서 있었던 수원과의 경기는 아직도 기억난다. 꽉 들어찬 관중 앞에서 경기를 했는데, 우리가 1-0으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 종료 직전에 (이)기형이에게 헤딩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연장전에서 박건하에게 골든골을 내줘 패했었다. 볼점유율도 우리가 높았고, 득점찬스도 많이 잡았는데,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그 경기를 이겼으면 선두로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개인적으로 프로경기 중에 가장 아쉬웠던 경기였다.
(부천vs수원 기사 클릭)

- 당시를 회상하면 98 월드컵을 계기로 K리그도 한차례 큰 변화를 맞이했던 것 같다.

내가 95년에 상무에 가서 98년초에 K리그에 복귀했는데, 경기력 자체를 놓고 보면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월드컵으로 인해 서포터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다는 것, 그리고 이동국, 고종수라는 신세대 스타들이 부상했다는 것과 안정환이 머리를 기르고, 귀걸이를 하고 등장하는 등 선수들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표출하게 됐다는 점이 많이 바뀐 부분들인 것 같다.

- 99년과 2000년에는 2년 연속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 K리그 생활 중에서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것 같은데.

그 무렵부터 내가 축구에 대해서 눈을 뜬 것 같다. 수비수임에도 골도 많이 넣었고,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도 보다 성숙해졌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전남에 와서 1년이 지난 2002년 무렵도 전성기였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 축구 선수의 전성기는 20대가 아니라 30대에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지금 각 팀에 베테랑들이 별로 없는데, 베테랑의 힘이란 것은 크다. 경험이란 것은 결코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단 관계자나 감독님들도 그런 부분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30세만 넘어도 ‘이 선수는 못뛰고 쓸모없는 선수’라는 인식이 많았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앞으로 베테랑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이 좀 더 좋아졌으면 한다.
사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 서러움이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잘 나갔는데, 나이 들면서 눈치도 보게되고 말이다.(웃음) 나는 눈치 안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나이가 드니까 눈치가 보이더라.

그런 부분을 구단이나 코칭스태프에서 감싸주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그런 점에서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우리 선수들도 외국과 마찬가지로 간판으로서 팀을 위해 애썼다면 그에 대한 예우와 존경도 필요한데, 구단에서는 은퇴해주길 바라는 그런 상황에 몰리는 것이 안타깝다.

- 2000년에는 갑자기 오스트리아로 진출하게 됐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다. 아직도 내가 부천구단과는 별로 관계가 좋지 않은데, 지금도 부천 구단이 선수들에 대한 투자가 인색하긴 하지만 그 당시에도 너무 인색한 구단이었다.

내가 매년 구단과 연봉협상을 하면서 물론 내 자신이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 외에도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팀의 간판인 내가 연봉 수준을 올려놔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99년인가 2000년에 계약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구단과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구단은 “너는 이 정도니까 이것만 받고 해라”고 통보를 했다. 그것은 연봉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을 뿐이다.
연봉협상이란 것은 선수와 구단이 서로간의 입장을 제시하고, 타협점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인데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싸우느라 연봉협상이 늦어져 항상 시즌 초 컵대회에서 2-3경기를 못 뛰곤 했다.

2000년 무렵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는데, 구단 방침은 아마 ‘강철이를 한번 혼내줘야겠다’인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올스타-한일 프로올스타 친선경기에 참가 중이었는데, 시합 당일 날 아내한테서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더라.
무슨 말인가 물어봤더니 스포츠뉴스에서 구단에서 나를 유럽으로 코치연수 겸 선수로 보내겠다는 보도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한테는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그 때가 12월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면 팀을 알아봐줘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에이전트였던 이영중씨와 상의를 했고, 유럽은 1월 중순인가까지 엔트리 마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없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독일로 넘어갔는데, 팀을 알아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팀이 선수들을 다 뽑은 상태였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왔다는데 뽑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테스트도 받지 못하고 벨기에로 넘어갔다. 벨기에나 오스트리아 같은 곳은 2월말까지 선수등록이 가능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벨기에로 가는 도중에 이영중 씨가 아는 독일 매니저가 오스트리아 라스크 린츠에서 테스트를 한번 받아보라고 권유해서 가는 김에 들렀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다음날 라스크 린츠와 오스트리아 올림픽대표팀간의 연습경기가 있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인조잔디에서 경기를 했다. 전반에 나보고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덩치가 큰 선수들이고 인조잔디이고 하니까 내가 툭 차고 달리면 쫓아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웃음) 그래서 합격하고, 계약을 했다.

- 부천 구단에는 섭섭한 부분이 많았겠다.

섭섭한 것이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러면서 언론에는 연수차 유학을 보낸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내가 오스트리아에 6개월 동안 있을 동안 부천 구단에서 단 한번의 전화도 없었다. 라스크 린츠와 계약할 때 한번 이상한 팩스가 하나 날아왔는데, 정말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공개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구단이 나한테 정말 큰 실수를 했다.

그러다가 내가 한국에 다시 들어가는데, 부천이 아니라 전남이나 수원으로 간다고 하니까 부천 서포터들이 난리가 났었다. 언론과 서포터들의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왜 받지 않았느냐, 계약할 때 한국 오면 우리 팀에 오기로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더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화가 오면 번호가 다 나오는데,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도 부천구단과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 오스트리아에서 생활하면서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나중에 가족이 들어오고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다 보니까 막상 한국에 들어오게 됐을 때 아내는 한국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들 교육 여건도 그렇고, 문화적인 부분이나 여러 면에서 오스트리아가 좋다는 것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이회택 감독님(당시 전남 감독)이 매일 한번씩 전화를 하셔서 도와달라고 그러셨다. 이 감독님은 나를 89년에 처음 대표팀에 뽑아주셨던 분이셨고, 여러 번 신세를 졌던 분인지라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 당시 전남과 수원에서 쟁탈전이 있었는데, 금액 면에서는 수원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었다. 아내도 수원이 수도권인지라 아이들 교육 여건상 수원으로 갔으면 했고...

그렇지만 이회택 감독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내도 내 마음을 이해해줘서 결국 전남으로 가게 됐다.

- 전남으로 옮긴 이후 부천과의 원정경기에서 부천 서포터들의 야유도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유 엄청 많이 받았다.(웃음) ‘배신자 강철 XX’라는 플래카드도 나오고...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서포터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8년 동안 내가 몸담았던 팀이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렇지만 그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야유를 달게 받았다. 구단이 나를 버린 것이지, 내가 구단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일이 이야기해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 사실 부천에서는 팀의 간판이었지만, 전남에서는 간판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보다 더 서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광양이 지방이고, 노상래, 김태영, 김도근, 박종문 선수 같이 그 팀에서 오랜 기간 뛰었고, 그 지역팬들도 사랑하는 간판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 비중은 낮았다.

그렇다고 내가 구단에게 왜 간판 대우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감독님만 그런 대우를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주장까지 하면서 나름대로 팀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쯤 되면 ‘전남의 간판이 누구다’라는 것은 신경이 쓰이지 않고, 경기에만 열중하게 된다.

- 그 무렵부터였던가? 왼쪽 윙백이 아닌 3백 시스템의 중앙에서도 많이 뛰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도 가끔 그 자리를 본 적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2001년 이집트에서 열린 LG컵에서 히딩크 감독님이 명보 형의 공백을 메우라고 해서 봤는데 괜찮은 평가를 받았었다.
전남에 와서도 처음에는 윙백 쪽에서 뛰다가 수비 보완의 일환으로 리베로를 보곤 하다가 1년 뒤에 서현옥 코치님이 오신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리베로로 할동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많이 뛰지 않고, 전체적인 컨트롤만 해주면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윙백보다는 리베로가 편한 것이 사실이다.

- 전남의 어린 선수들에게는 무서운 선배로 인식되는 것 같던데.(웃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나. 가르쳐달라.(웃음) 무서운 선배가 아니라 내가 주장을 많이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팀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 선수들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땀 흘리고, 고생하는 동료들이 있는데, 거기에서 운동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주장으로서 질책해야 하지 않겠나. 나도 싫은 소리 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웃음)
주장만 아니라면 나도 그냥 내 할일만 하면 편하다. 그러나 주장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무서울 때는 무서워야 하고, 동기유발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축구하는 후배들이 나를 무섭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주장 역할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런지 내 인상이 차갑다고 한다.(웃음)

- 선수 시절을 돌이켜볼 때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인가?

아무래도 우리 세대의 선수들 아니겠는가.
일단 선홍이 형, 명보 형, 고정운 선배, 구상범 선배 등을 들 수 있겠고, 동기 중에는 최문식 선수와 잘 맞았던 것 같다.

- 최근 젊은 선수들 중에서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는 선수는 있는가?

(김)진규를 눈여겨보고 있다. 일단 체격조건도 좋고, 센스도 있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선수다. 앞으로 대성할 것 같다. 전남에 있을 때 원정경기에서 같은 방을 썼었는데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야기도 많이 해줬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진규가 앞으로 한국수비를 이끌어줬으면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예전과 지금은 세대가 많이 틀려졌는데, 어린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예전을 돌이켜보면 공부를 너무 안했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오스트리아에 갔다 오면서 그 무렵부터 2년여간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일단 선수들이 공부를 좀 하고 영어도 배워놓았으면 어디를 나가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책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내가 아는 것이 있어야 지도자가 되어서도 선수들한테 잘 가르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도 노력하고 있다.

- 현재 지도자 2급 과정을 밟고 있는데, 선수로 줄곧 뛰다가 지도자 교육을 받는 느낌도 색다를 것 같다.

이제 축구선수 강철이 아니라 지도자 강철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운동장에서 같이 뛸 때는 내가 그냥 이야기를 해줄 수가 있는데, 지도자가 되어서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어떻게 선수들이 이해하게끔 설명하는가 등의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지도자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는데, 반대로 어렵지만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하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것이 기대되고 설레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외국인 감독들을 접했을 때의 노하우도 활용해 유소년부터 가르치고 싶다. 어린 선수들에게 축구가 재미있고, 흥미있는 운동으로 인식되고 훈련을 기대하게 하는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다.

- 지도자 2급 과정과 10월에 있는 1급 과정을 끝마친 다음 해외연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영어가 많이 부족하다. 2년 동안 했지만 외국인과 막상 대화를 하려고 하면 단어가 목까지는 나오는데, 거기서 막혀버린다.(웃음)
그래서 영국 쪽으로 가서 지도자 수업도 받으면서 언어공부도 하고 싶다. 전남 구단에는 그렇게 이야기했고, 구단에서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 그렇다면 황선홍 코치와 같이 연수를 받게 되는 것인가?

선홍이 형은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온다. 둘이 같이 있으면 안된다.(웃음)
선홍이 형은 연말에 브라질로 연수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전남 코치로 부임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12월이 되어야 알 것 같다. 12월까지는 선수로 계약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년 1월이 되어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학을 가든지, 중-고 유소년팀에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 마지막으로 멀리 내다본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일단 유학을 가고 싶다. 1년이 됐든, 2년이 됐든 유학을 갔다와서 유소년부터 차근차근 밟아올라가고 싶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모든 지도자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유학기간 동안 영어를 완벽하게 익히게 된다면 외국에서 감독을 하고 싶은 꿈도 있다.

- 긴 인터뷰 감사드린다. 지도자로서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겠다.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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