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4년 2월 7일 KFA 홈페이지 기사..
- 1970년대에는 동남아에서 국제대회가 많이 열렸죠?
1970년대에는 동아시아권에서는 버마(현 미얀마)하고 우리가 가장 강했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도 만만치는 않았어요. 그 나라들은 축구열기도 높았습니다.
당시에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 킹스컵, 퀸스컵(이상 태국), 자카르타시 창립 기념대회(인도네시아) 등에 많이 출전했는데, 그 때만 해도 그 대회들의 비중이 매우 컸고 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했지요. 우리는 단골 초대국이었고, 우승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동남아대회에 참가했을때 문제가 생기면 꼭 자기들끼리 단합해서 우리를 몰아세워 수모도 많이 겪었습니다. 심판들의 장난에 의해서 여러 번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고...
- 80년대까지는 아시아 국제대회에 나갔을때 편파판정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하도 피해를 많이 입어서 저 같은 경우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와일드하고 다혈질적으로 바뀌었어요.(웃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생겼다하면 시합 도중에 심판한테 달려가서 항의하곤 했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되는 거지만 워낙 판정이 편파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언젠가는 전반전 끝나고 심판 라커룸까지 뛰어 들어가 항의하고 법석을 떨었더니 경비원이 갑자기 권총을 저에게 들이대더군요. 그것 말고도 위협적인 상황이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아랍권이 본격적으로 축구에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70년대 후반이 지나면서 오일달러의 위력을 앞세워 강호로 부상했어요. 그 과정에서 AFC 회의에서도 그렇고, 경기장 내에서도 그렇고 중동 나라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북한도 동북아 쪽으로는 중국(당시는 중공이라 불리웠음)과, 아랍 쪽에서는 쿠웨이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당시에는 우리가 어려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어요.
- 오랜 세월 단장으로도 활동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선수가 있으신지요?
음...일단 1970년대에 활약하던 이영무 선수(현재 할렐루야 감독)가 기억이 나네요. 당시 이영무를 ‘재수둥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선수가 대표팀에 합류해서 경기에 졌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죠(웃음).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었는데, 돌아가신 최정민 씨가 감독이었고, 김정남 씨가 코치, 내가 단장이었어요.
당시 이영무가 명단에서 제외됐기에 제가 의아해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여기서 밝히긴 좀 그렇군요.
어쨌든 내가 선수선발에 대해 감독에게 따졌던 사실을 당시 김윤하 축구협회 회장이 알게 되었고, 김 회장은 “단장이 할 일이 있고, 코칭스태프가 할 일이 있으니까 선수선발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마세요” 하면서 충고하셨지요.
그러다가 중간에 최정민 감독이 병을 앓아 감독을 그만두게 되었고, 김정남 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된 후에 이영무가 다시 합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도 책임감을 느껴서 선수단과 함께 태능선수촌에서 매일 묵었었죠.
어쨌든 이영무는 정말 성실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선수였고, 항상 책을 읽고 공부하는 선수였어요. 특히 성경을 애독했는데, 이영무의 적극적인 전도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죠.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기도소리가 들렸어요. 그 때는 태능선수촌 우리 숙소의 가운데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기도소리가 흘러나와 같은 방을 썼던 김정남 감독에게 물어봤지요. “저 소리가 뭡니까?” 그랬더니 김 감독이 “들리시죠? 영무가 기도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이영무는 새벽 1시, 2시에도 기도를 드리고는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새벽훈련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모습이었어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많이 뛰고, 열심히 훈련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아시아 각팀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아시아 선수 중에 경기장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로 이영무가 선정됐던 기억도 나는군요.
이런 일도 있었지요. 1973년에 이란에서 아시아 청소년대회가 열렸는데, 이영무 선수의 다리가 크게 부었었어요. 도저히 하루 이틀 쉬어서 될 문제는 아니었고, 당연히 코칭스태프에서는 다음날 출전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선수들 방을 돌아보는데 이영무가 안보이더군요. 당시 우리는 팀 사정상 의사를 데리고 가지 못했는데, 일본은 의사가 있었어요. 내 직감으로 혹시 밤중에 거기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찾아가봤더니 역시나 거기 있더군요. 말도 안통하면서 거기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거죠. 자기는 죽어도 경기에 나가야겠다는 거에요. 그 의사 말로는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 경기는 뛸 수 있다라고 하더군요.
그 다리로는 도저히 안된다고 코칭스태프도 말리는 상황에서 죽어도 경기에 나가겠다고 의사소통도 안되는 일본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해달라고 하는 이영무의 정신력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청소년 시절에 말이에요.
그리고 허정무 선수(현 용인 FC 총감독)도 기억이 나네요. 우리가 외국에 나갔다가 비행 일정상 홍콩에서 하루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어요. 코칭스태프에서 휴식을 줬고, 선수들은 모두 나가서 관광이다, 쇼핑이다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나간 뒤에 내가 각 방을 돌아봤는데, 허정무가 방에 남아있더군요. 내가 “왜 너는 안나가냐?”하고 물었더니 “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관광, 쇼핑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쉬면서 재충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는 거에요. 모두들 신이 나서 쇼핑, 관광을 하고 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버리고 그 동안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방에서 쉬는 거였어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요.
일단 대표적으로 이 두 명을 언급했지만, 사실 그 시절의 선수들은 너무나 순수했던 것 같아요. 나는 선수들을 데리고 해외에 나갈 때 항상 그 나라의 박물관을 데리고 가곤 했었지요. 선수들의 기량 못지 않게 지식, 교양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아침에서 저녁까지, 식사할때부터 같이 다니면서 교양문제나 갖춰야할 태도,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조언 등을 기탄없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것을 선수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선후배간의 질서, 서로간에 존경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이 시절의 선수들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각자 자기 몫을 다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고, 축구계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에서 4강신화를 달성했을 때 단장이셨는데, 당시를 회상하신다면.
그 당시에는 선수들이 모두 태릉선수촌에서 장기합숙을 했었지요. 내가 단장이기 때문에 회사에 잠시 나갔다가 오후에는 선수촌으로 가서 선수들과 함께 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멕시코 고지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들 입마개를 하고 훈련을 했어요. 훈련 자체도 강도가 높았는데다가 입마개까지 했으니 선수들이 정말 힘들어하더군요.
다른 나라 선수들은 미국 등지에서 고지적응훈련을 하고 멕시코로 향했는데, 우리는 여건상 그렇게 훈련을 했던 거지요. 정말 힘들고 독하게 훈련을 했는데도 선수들이 참고 잘 따라와 줬습니다.
그런데 멕시코 현지에 가서는 선수들이 현지 음식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바람에 식사도 매번 밥에 고추장을 비벼서 먹곤 했어요. 날씨는 더운데다가 시간이 가면서 기운도 떨어지고, 매번 고추장 먹고, 물 마시고 그러니까 모두 기운이 없었지요.
할 수 없이 시장에 나가 우족을 사서 식당에 특별히 부탁해서 끓여서 선수들에게 먹였지요. 그거라도 먹으면 기운이 좀 날까 싶어서...
그런데 우족을 입에 대지도 않는 선수, 먹고 설사하는 선수도 나오고... 노력이 허사가 됐지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렇게 됐으니 나도 심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럼에도 4강까지 올라갔으니 대단한 거지요.
심판문제도 빼놓을 수 없지요. 우리가 준결승에서 브라질과 맞붙었는데, 아벨랑제 당시 FIFA 회장과 같이 앉아서 경기를 봤어요.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심판이 아벨랑제 회장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군요. 결국 김종부가 먼저 골을 넣고도 역전패를 당했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대신 FIFA에서는 대회 페어플레이상을 우리에게 줬던 기억이 납니다.
- 평소 파이프 담배를 좋아해 국제축구계에서는 오 파이프(Oh Pipe)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오 파이프”가 나타나면 AFC를 비롯해 각국 관계자들이 긴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웃음)
하하..긴장까지야 했겠습니까.(웃음) 외국의 축구협회에서도 임원들이 그렇게 자주 바뀌지 않기 때문에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가까워졌지요. 그런데 그 긴 세월 동안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면 내가 쓴소리를 많이 하고 그러니까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파이프 담배를 처음 피운 것은 1960년 미국에서 견습생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주말에 할 일은 없고, 집생각도 나서 담배를 피우려고 했지요. 그런데 일반 담배 대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 뭔가 무게도 있는 것 같고, 또한 담배 중에는 파이프 담배가 가장 좋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피우게 됐어요. 파이프는 향을 코로 감미하는 매력이 있어요.
지금까지 파이프만 한 150-160개 정도 모았습니다. 외국에 자주 나가게 되는데, 나갈 때마다 좋은 파이프가 있으면 사고, 그러다보니 외국 친구들도 선물로 파이프를 주고 그랬지요. 그 동안 다른 분들에게 주고 해서 지금은 50-60개 정도 밖에 안남았어요.(웃음)
1990년대에 남북체육회담이 열렸을 때는 북한 임원들에게 파이프와 타바코, 소지기구 등을 선물하기도 했어요. 북한 임원들이 보니까 냄새가 좋거든요. 그런 차에 내가 준다고 하니까 받더군요.
아, 외국에 나갔을 때는 호신용으로도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가 접근했을 때 파이프로 찌르면 의외로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어요. 젊었을 때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 효과를 본 적도 있었지요.(웃음)
- 38년의 세월 동안 많은 축구협회장을 보좌하셨는데요.
최치환 회장을 시작으로 장덕진, 고태진, 김윤하, 박준홍, 최순영, 이종환, 김우중, 그리고 정몽준 회장까지 9명의 회장을 모셨네요. 이종환 씨(현 부회장)는 두달 정도 잠깐 회장직을 맡았고요.
처음 축구협회에 들어왔을 때 최치환 회장은 축구인 중에 행정가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셨죠. 장덕진 회장은 각 금융기관이 축구단을 창단하는데 힘을 쓰시는 등 선수들의 직장을 구해주기 위해 애쓰셨지요. 사실 그것이 뿌리가 되어 그 때부터 축구붐이 일어났습니다. 이 밖에 다른 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많은 공헌을 하셨어요.
그리고 1993년에 정몽준 회장께서 취임했는데, 나보고 부회장을 다시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사양을 했어요. 이제는 내가 축구계를 떠나야 후배들이 빨리 올라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정 회장님은 큰 포부를 갖고 있었어요. 나보고 “오 부회장이 그래도 FIFA와 AFC에서 오랜 기간 인맥을 쌓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2002 월드컵을 유치할 계획을 갖고 있고, 그 전초전으로 AFC를 대표하는 FIFA 부회장 선거에 나갈 생각입니다. 이 계획들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오 부회장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하고 말씀하더군요.
한참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한 열의가 느껴졌고, 의미있는 일이 되겠다 싶어서 내 힘이 닿는대로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이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기에 지금 돌이켜봐도 잘한 결정이다 생각됩니다.
- FIFA 부회장 선거나 2002 월드컵 유치 과정 등에서 힘들었던 일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장덕진, 고태진 회장도 AFC 부회장으로 선출된 적이 있었어요. 특히 고태진 회장 같은 경우는 선거 과정도 힘들었고, 1표차로 가까스로 당선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그후에 AFC 총회나 집행위원회에 한번도 참석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아시아 각국에서는 “AFC나 FIFA 부회장에 한국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팽배했지요. 더군다나 북한이나 일본의 반대도 있었고...
1994년에 FIFA 부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1993년에 처음 국제 축구계에 등장한 정몽준 회장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선거전이었죠. 그래도 다행히 그 동안의 인간관계 등으로 가까운 친구가 됐던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줘서 1표차로 정몽준 회장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FIFA 부회장에 선출됐지요.
그것이 한국축구계, 그리고 아시아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물론 2002 월드컵 유치과정에서도 결정적인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운도 많이 따랐던 것이 아랍 진영에서 후보가 2명이 나왔던 거에요. 만약 1명이 나왔다면 아랍 진영이 단합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낙선되었을텐데, 2명이 나오는 바람에 아랍표가 분산됐지요.
2002 월드컵 유치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일본이 워낙 앞서가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처음에는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적었지요. 오히려 방해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웃음)
정말 정몽준 회장과 함께 전세계를 상대로 발로 뛰었지요. 밤새 비행기 타고, 도착해서 바로 현지 관계자들 만나 설명하고...세계를 수십바퀴 돌았습니다. 정말 웬만큼 체력관리를 해서는 소화할 수가 없는 일정이었어요.
당시 정 회장은 현지에 도착하면 눈 잠깐 붙였다가 시차에 맞춰 운동을 하면서 체력관리를 했어요. 나 역시 나이는 많지만, 예전에 축구선수 생활도 하고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고 같이 운동을 했지요. 다른 일행들 중에는 따라오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았어요.(웃음)
한번은 남미를 방문했는데, 장거리 여행이었지요. 우리와 같이 동행했던 외교관들이 힘들었는지 도중에 페루에서 하루 쉬다가 가자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당신들은 쉬고 있으시오. 우린 먼저 가야겠소”하고난뒤 예정대로 먼저 갔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이런 힘든 과정 속에서 2002 월드컵을 유치했고, 제가 월드컵 유치에 일조했다는 것에 상당한 보람을 느낍니다.
- 지난 38년 동안 축구협회에서 일하시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후회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역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 4강 진출과 2002 월드컵 유치 성공, 그리고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을 때입니다.
특히 2002 월드컵 4강 신화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됐다는 점이 감격스러워요.
선수나 스태프, 축구협회 임원들 모두 잘했지만, 온 국민의 기(氣)가 우리 선수들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자기 능력의 120%를 발휘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로 인해 온 국민을 즐겁게 해줬고,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떨쳤지요.
반면 특별히 후회스러웠던 순간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조금 더 일찍 은퇴해서 후배들에게 빨리 큰 역할을 물려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에요.
-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그리고 축구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먼저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선후배간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아무리 축구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고 하더라도 가장 귀중한 것은 선후배간의 화합과 질서입니다. 과거에는 이 부분에서 매우 훌륭했어요. 선배가 후배를 사랑하고 아끼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런 풍토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런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각자 따로 놀기 시작했어요. 가장 마음 아프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들이 다시 소생했으면 여한이 없겠어요.
그리고, 축구팬들에게는 한국축구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더 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축구를 아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승하면 “와~”하고 칭찬했다가, 졌다하면 무서울 정도로 온갖 비난을 퍼붓는 것은 결코 선수들에게, 그리고 한국축구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 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지난 38년 동안 한국축구를 위해 애쓰신 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MUKTA 상헌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