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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최문식, “90년대를 수놓았던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

97년 5월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과의 친선경기(아래줄 맨 오른쪽 최문식)


각급 대표팀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신 최문식은 이후 98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도 같은 불운을 되풀이하게 됐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의 첫 번째 공식경기(1997년 1월 18일 호주 멜버른)인 노르웨이전에서 최문식은 선발출장, 날카로운 스루패스로 김도훈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98 월드컵 아시아 6조 예선과 코리아컵 등 거의 대부분의 A매치에 선발 또는 교체투입되며 차범근 사단의 주요전력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97년 8월 30일 한중 정기전을 끝으로 더 이상 최문식의 이름을 대표팀 출전선수명단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9월부터 홈 & 어웨이로 진행된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그리고 최종목표인 98 프랑스월드컵 최종엔트리에서도 최문식은 제외되고 말았다.

대표팀 출범 초창기에 좋은 활약을 펼치다 결국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선 외면을 받는 최문식의 대표팀 징크스가 또다시 재연된 것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청소년대표팀 시절부터 번번이 초반에 잘 하다가 결국은 중요한 순간에 외면을 받더군요. 하다보면 계속 좋은 것만 보여줄 수 없는 것이고, 새로운 선수나 감독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선수가 나오면 그 선수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번번이 그런 경우를 당하니까 아쉬움도 많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계기로 한 단계,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축구인생 최고의 위기, 그리고 상무 입대

다시 프로로 돌아오면 1995년은 최문식에게 있어 최악의 한해였고, 또한 고비였다. 최문식은 국가대표팀 차출로 바빴던 1994년 총 19게임에 출장해 6골, 6도움으로 게임당 0.63 공격포인트의 순도 높은 활약을 펼쳤고, 비록 경기에 나서진 못했지만 미국월드컵 무대를 밟으며 경험을 쌓았다.

그랬던 만큼 1995년을 맞이하는 포항구단이나 축구팬들, 그리고 최문식 본인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프로 7년차(24세)로 모든 것이 최절정기였던 이 상황에서 최문식은 불의의 부상으로 1년여를 그냥 소비하고 말았다.

이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웠는지 최문식은 날짜와 상대팀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해는 뭔가 해볼 만 하다라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몸도 좋았고, 정신적으로도 의지가 충만해있던 그런 시점이었는데... 95년 4월 23일 LG전이었어요. 진단은 발가락에 금이 갔고, 피로골절 진단을 받았죠. 4월에 다쳐서 6-7개월간 기브스를 하고 있었어요. 거의 1년을 그냥 소비한 셈이었습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위기감이 컸던 한해였어요. 이렇게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6-7개월간 기브스를 하고 있자니 ‘이대로 선수생활을 접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공도 차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계속 들고..아무튼 많이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심신이 힘든 상황에서 최문식은 상무 입대를 결정했다. 어차피 군문제를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과감하게 선택한 것. 결국 최문식은 95년 겨울, 상무에 입대하게 된다.

사실 일반적으로 프로에서 뛰던 좋은 선수들이 상무에 입대하고 난 뒤 예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와는 다른 팀지원환경과 아마추어대회 참가로 인한 경기력 저하 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최문식의 경우는 오히려 상무에 입대한 이후 국가대표팀에도 뽑히는 등 상승세를 탔다.

“축구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의 축구철학이나 주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묵묵히, 열심히 내 축구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내 운동만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우연찮게 대표팀에도 발탁되었죠.”

“발탁된 뒤에도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그냥 성실하게 내 플레이를 하자는 생각이었고, 기회가 와서 예선에서 골도 넣고 그랬죠.(웃음) 이런 것들이 상무에 가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98년 상무를 제대하고 포항에 복귀하다.

상무에서의 군복무를 마치고 1998년 포항에 복귀한 최문식은 그해 36게임에 출장하며 자신의 프로생활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경기출전횟수를 기록했다. 많은 선수들이 상무에서 제대한 뒤 다시 프로무대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과는 달리 쉽게 적응한 셈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프로생활을 해왔기 때문인지 프로무대에 복귀해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내 임무를 열심히 하고, 감독님이 저를 필요로 했을 때 그 역할을 해주고..그러다보니 출장횟수도 많았죠.”

1998년 당시 포항은 최문식이 군입대하기 전과 비교할 때 많은 멤버 변화가 있었다. 황선홍, 홍명보, 라데 ‘3인방’이 모두 팀을 떠났고, 그 밖에 여러 주축 선수들도 은퇴했다.

반면 베테랑 고정운(98년 입단), 안익수(96년 입단)와 이라크 출신 압바스 자심(97년 입단), 크로아티아에서 온 싸빅(98년 입단) 등이 새로 가세했으며, 새내기 이동국과 백승철이 프로데뷔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도 이회택, 허정무 감독에 이어 박성화 감독이 96년부터 지휘봉을 잡고 있던 상태.

이중 자심은 여러 가지 면에서 최문식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선수였기에 포지션 중복이 걱정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자심과 제가 스타일상 비슷한 부분이 많긴 하죠. 그런데 박성화 감독님은 둘 다 필요한 선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심과 제가 번갈아 뛰기보다는 포지션 변화를 통해서 둘이 같이 뛰는 경우가 많았죠. 서로 비슷한 스타일인지라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포지션 변화를 줬기 때문에 계속 경기를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동국과의 호흡 역시 98년 최문식의 중요 과제였다. 98년 이동국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포항에 입단했다. 최문식으로부터 시작된 고졸스타 계보를 잇는 대형 스트라이커였다.

데뷔 초부터 이동국은 어린 선수답지 않게 골게터로서의 본능적인 감각을 뽐냈고, 여기에는 황선홍, 라데 등 일류 골게터들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최문식의 도움도 컸다.
올해초  있었던 본 홈페이지 인터뷰에서도 이동국은 최문식, 자심 등의 좋은 패스가 있었기에 데뷔 첫 시즌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동국이는 골센스가 뛰어나고, 골문 앞에서 볼처리 능력이 매우 훌륭한 선수입니다. 다만 그때만 해도 파워가 부족한 면이 있었죠.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와서 그런지 프로의 파워를 완전히 소화하기엔 다소 처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즉 감각은 있는데 파워가 조금 떨어지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그런 부분을 생각해서 닥친 상황마다 앞쪽으로 찔러줄 것인지, 발 앞에다 바로 놔줄 것인지 등을 고려해서 패스했죠. 그런 부분 때문에 동국이가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어쨌든 동국이 뿐만 아니라 각자 해야할 위치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어요. 동국이나 (백)승철이는 골을 넣는 것이 임무이고, 저를 비롯한 미드필더는 최전방 공격수들에게 어떻게 볼배급을 해주느냐가 임무죠. 저 같은 경우도 선후배들이 많이 도와줘서 편하게 볼을 찰 수 있어 고마웠어요. 반면 동료들도 제 도움을 받아서 골을 많이 넣으면 서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한가지 최문식은 이 해부터 독특한 골세레모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골을 넣은 뒤 유니폼을 뒤집어쓰고, 엉덩이를 흔드는 독특한 골세레모니를 했던 것. 이후 이것은 최문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골을 넣을 때마다 축구팬들은 이 독특한 세레모니를 즐겁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프로라는 것은 쇼맨쉽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고심을 했죠. 원래 유니폼 뒤집어 쓰고 달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라데가 원조예요. 그것이 인상적이었기에 저도 하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남들과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죠.”

“그래서 어떻게 할까 나름대로 생각하다가 유니폼을 뒤집어 쓴 채 뒤로 돌아서서 꾸부정한 자세로 이상한 춤을 췄어요.(웃음) 아마 98년 대전과의 경기에서 처음 했을 겁니다. 그것을 보고 포항 서포터들도 그렇고, 축구팬들도 좋은 반응을 보여주시더군요. 또 보고 싶다고도 말씀하시고.. 팬들이 그것을 좋아하니까 계속 하게 됐습니다.”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다.

이 시즌 포항은 정규리그 내내 울산, 수원 등과 1위 경쟁을 펼쳤고, 최문식은 풀타임으로 뛴 경기는 적었지만, 주로 선발로 투입되어 후반 중반까지 팀의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98시즌 6골, 2도움.

“개인적으로 98년은 정말 아쉬움이 많았던 해였습니다. 상무에서 제대하고 포항에 복귀한 첫해였고, 나름대로 제 역할을 잘 해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승을 정말 절실히 바랬고, 실제로 우승 문턱까지 갔던 상황에서 놓쳤기 때문에 너무 안타까웠죠.”

98시즌은 독특한 방식으로 리그가 진행됐는데, 90분 경기에서 승리하면 승점 3점, 연장전에서 승리하면 승점 2점,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면 승점 1점을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제도가 신설되어 리그 4위팀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시스템이었다.

포항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안양과 맞섰고,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정규리그 1위가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최문식은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되었고 후반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서 있었던 포항은 정규리그 1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후반 45분이 지났고, 모두들 1위가 확정됐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저리 타임에 코너킥을 허용했고, 그것을 무탐바가 헤딩골로 넣어버렸죠. 정말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경기에요. 그 순간만 견뎠으면 1위로 직행하는건데...”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7-8로 졌어요. 1위를 거의 손에 넣었다가 3위로 떨어졌죠.  안양까지 올라온 포항 서포터들은 샴페인까지 준비해서 터트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던데...그야말로 다잡은 고기를 놓친거죠.”

최문식과 포항의 불운은 포스트시즌에서도 계속됐다. 전남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어렵게 승리한 포항은 울산과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포항에서의 1차전에서 최문식은 백승철과 선발 투톱으로 기용됐다. 그리고 이 경기는 K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명승부로 기록되었고, 포항은 3-2로 극적으로 승리하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최문식 역시 후반 40분에 1골을 기록하며 팀 승리에 일조했다.

“정말 극적인 경기였죠. 우리가 전반에 먼저 1골을 내줬다가 후반에 (김)명곤형이 동점골을 넣었어요. 그리고 후반 40분이 다 되어 가도록 1-1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제가 극적으로 역전골에 성공했죠. 승철이의 슛이 울산 수비수 맞고 흘러나왔고, 마침 제가 거기에 있었어요. 감격적인 골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축구라는 것이 참 묘하더군요.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후반 인저리 타임에 울산에게 1골을 내주고 말았죠. 정말 다리힘이 쭉 빠지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 드라마가 터졌어요. 휘슬이 울리기 직전 우리가 또다시 골을 터트린 거예요. 승철이의 정말 대포알같은 중거리슛이었죠. 정말 보는 사람이 통쾌해질 정도의 슛이었어요. 아마 이 골은 축구팬들은 아직까지도 기억하실 겁니다. 골 터진 후 모두 얼싸안고 난리났죠. 서포터들에게 가서 다이빙 세레모니도 하고...”

그러나 기쁨도 잠시. 최문식과 포항은 울산에서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문식은 이날 경기에서도 선발멤버로 기용됐고, 경기는 김현석과 박태하 두 베테랑의 득점으로 1-1로 진행됐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포항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이 확정되는 상황.

시간은 후반 45분으로 치닫고 있었고, 사실상 포항의 진출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후반 45분, 울산은 프리킥 상황에서 득점을 위해 골키퍼 김병지까지 공격에 가담했고 김현석의 프리킥을 김병지가 헤딩골로 연결시키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 골은 그날 저녁 CNN을 통해 전세계에 전달될 정도로 극적이었다. 상무 제대 후 첫 시즌에서 기필코 팀을 우승시키겠다던 최문식의 목표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병지형에게 골을 내준 뒤의 허탈감과 아쉬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울산 선수들과 관중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우리는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죠.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도 그렇고, 어떻게 그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했는지..너무 아쉬웠어요.”

아쉬움도 많았던 98시즌이 끝나고 포항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포항의 수비를 책임졌던 안익수와 공문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묵묵히 살림꾼 역할을 했던 서효원 등이 차례로 팀을 떠난 것. 이것은 최문식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고, 자신의 장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세 분 모두 2-3년은 더 활약하실 수 있는 선배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진로문제라든지,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구단의 생각 등으로 인해 결국 팀을 떠나게 됐어요. 함께 했던 동료로서 안타까왔죠. 나이가 들면 이런 대접을 받게 되는가 하는 허탈감도 들었고..”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마음에 걸렸던 탓일까. 최문식은 은퇴할 때까지 영원히 같이 할 것만 같았던 포항 유니폼을 벗고, 99년초 전남행을 결정했다.

당시 전남에는 최문식을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준 스승 이회택 감독이 새롭게 사령탑을 맡고 있었고, 최문식은 옛 스승 밑에서 다시 한번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수많은 포항팬들의 만류와 포항에 대한 자신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전남행을 선택한 이유였다.

-> 4편에 계속...

-- MUKTA 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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